기업들이 경영권 방어를 위해 자주 사용하는 자사주를 활용한 경영권 방어가 일반 주주들의 피해를 줄 수 있어 제도적 보완이 시급하다는 분석을 국책연구기관이 제시했다.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서 사용돼 법정 공방으로까지 이어진 자사주 매각을 통한 경영권 방어 전략이 일반·소액주주의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조성익 KDI(한국개발연구원)연구위원은 '자기주식 처분과 경영권 방어' 보고서에서 이같이 주장하며 "자자수를 활용한 기업경영권 방어, 유지, 상속은 주주평등의 원칙에 위배될 수 있어 보완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조 위원은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의 합병 때 사용된 자사주 매각 사례를 분석했다.
당시 삼성물산의 주주였던 미국계 사모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두 회사의 합병에 반대하자, 삼성물산은 주주총회에서 표 대결을 위해 '백기사'로 나선 KCC에 자사주 899만주(5.76%)를 매각하기로 했다.
엘리엇은 "삼성 오너가가 삼성전자 경영권 승계를 위해 삼성물산 주주에게 손해를 끼치려 한다"며 자사주 매각 금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냈다. 이후 법원이 삼성 측의 손을 들어주고 임시 주총에서 합병 안건이 가결됐다.
통상 자사주는 회사 밖에서 유통되면 경제적 가치가 있지만, 회사 안으로 들어오면(자사주) 가치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이런 자사주를 다시 외부에 처분하면 경제적 가치가 생겨나기 때문에, 새로운 주식을 발행해 유통하는 신주 발행과 재무적으로 같은 행위라고 조 위원은 봤다.
조 위원은 "자사주 처분과 신주 발행은 경제적으로 같지만 현행 법령은 둘을 차별적으로 취급하고 있다. 이 차이로 자사주가 경영권 방어수단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백기사에게 자기주식을 처분한 사례
우리나라에서 백기사에게 자기주식을 처분한 사례는 두 번 있었는데, 두 번 모두 KCC가 백기사 역할을 맡았다. 2003년 8월 현대엘리베이터에 대한 외국인 지분율이 빠르게 상승하자, 현대엘리베이터는 경영권 방어 차원에서 KCC 등 범현대가 계열기업 6개에 자기주식 43만주(7.67%)를 매각했다.
조위원은 "현대엘리베이터의 일반주주 및 소액주주들은 이 거래로 인해 손해를 보았을 가능성이 다소 존재한다. 자기주식 처분 대가로 현금을 확보하기는 하였으나, 이 거래가 경영권 유지 차원에서 이루어진 급매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장기적 목표하에서 최적의 투자처에 적시에 사용되었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또 오히려 저가 판매나 다른 이익의 제공 등 백기사 기업들에게 명시적 암·묵적 추가 보상이 이루어져, 기업 및 주주들에게 손해가 생겼을 가능성이 있고 7.67%에 달하는 의결권이 지배주주의 통제력에 추가됨에 따라, 일반주주들의 의결권이 줄어들었다는 점에서 비례적 권리의 침해 문제도 발생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계열사에 자사주를 처분한 사례
2014년에 삼성화재가 지분율 4%에 달하는 자기주식을 삼성생명에 처분하고, 그 대가로 삼성생명이 보유하던 삼성물산 지분 4.79%와 현금 417억원을 확보한 바 있다.
조 위원은 이거래와 관련, "삼성생명 입장에서는 삼성화재 지분을 획득하기 위해 삼성물산 지분을 처분한 것이니, 효율성이 좋지 않은 교환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그러나 삼성화재는 자기주식을 매각한 자금을 사업 시너지를 기대하기 어려운 삼성물산에 투자한 셈이 되었으니, 최적의 투자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 삼성물산은 삼성그룹의 지배구조에서 매우 중요한 기업이므로, 지배주주 입장에서는 이 거래 과정에서 경영권 프리미엄을 중요하게 고려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2001년 현대자동차는 4.87% 지분율의 자기주식과 1,091억원을 인천제철에 주고, 인천제철로부터 기아자동차 지분 9.74%를 받은 거래에 대해서도 "현대자동차그룹의 지배구조를 순환출자구조로 개편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상당한 수준의 가공 의결권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에 따라 관련 기업 일반주주 및 소액주주들의 비례적 권리가 적지 않게 훼손되었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특정 기업의 경영권을 확보하기 위해 계열기업의 자금 동원
조위원은 "2008년 현대자동차그룹은 신흥증권을 인수하여 HMC투자증권을 출범시켰는데, 인수 당시 지분율이 29.76%로 지분율을 추가로 증가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에 HMC투자증권이 보유하고 있던 자기주식을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현대모비스, 현대제철, 현대엠코가 매입하여 내부 지분율이 38.41%까지 증가했다"며 "자동차 관련 회사, 철강회사, 건설회사가 증권사 지분을 보유하는 것이 사업 시너지를 위한 것이라고 판단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자사주 매입을 통한 경영권 유지
2014년에 삼성SDI와 제일모직이 합병하였는데, 이 합병의 결과 삼성전자의 삼성SDI 지분율은 20.4%에서 13.5%로 하락할 것으로 예측됐다. 이에 삼성전자는 삼성SDI에 3,442억원, 제일모직에 1,430억원을 지불하고, 두 기업의 자기주식을 확보하였다. 이 매입으로 인해 삼성전자는 합병 이후에도 (통합)삼성SDI의 지분율을 19.6%로 유지할 수 있었다.
이 거래와 관련, 조위원은 "삼성전자의 안정적 부품 확보라는 차원에서 삼성SDI의 경영 시너지는 작지 않을 것이지만, 경영권 확보 목적으로 매입한 지분은 유동성이 크게 떨어져 투자효율성 측면에서 한계가 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5,000억원에 가까운 자금을 투입한 삼성전자의 결정이 삼성전자 및 일반주주에게 이롭지 않은 결정이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고 결론을 내렸다.
KDI가 제시하는 개선책은?
조 위원은 현재 한국의 자사주 운용 제도가 적어도 암묵적으로 대기업의 경영권 방어수단 활용 가능성을 정책적으로 고려해 설계된 것이라고 보면서 중·장기적 관점에서는 자사주를 경제적 본질에 맞게 재무관리수단으로만 활용하도록 하되, 단기적으로 회사의 가치를 훼손하고 주주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과도한 경영권 방어를 제어할 정책수단이 필요하다고 봤다.
조 위원은 "감독 당국의 자기주식 처분 심사를 도입해 일반·소액주주의 손실 가능성을 사전·사후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며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독립적 사외이사의 역할이나 일반·소액주주의 손해배상 청구 등 시장을 통한 자율적 규율이 이뤄질 수 있도록 제도 전반을 정비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한익재 기자 gogreen@greened.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