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정의선 현대자동차 총괄 수석부회장 면전에서 잇달아 '광주형 일자리' 작심 발언을 꺼냈다.
문 대통령은 지난 2일 중소기업회관에서 열린 신년회에 이어 17일 울산지역 경제인과의 오찬에서 '광주형 일자리'를 언급했다.
두 행사는 모두 정의선 부회장이 참석한 자리였다.
문 대통령은 지난 10일 신년 기자회견에서도 광주형 일자리를 강조한 바 있어 현대차그룹으로서는 정부의 재촉에 압박을 받는 모양새다.
문 대통령은 17일 오전 울산시청에서 열린 정부의 ‘수소경제 로드맵’ 발표행사에 참석한 후 지역경제인들과 오찬 간담회에서 “‘광주형 일자리’가 단순히 광주에서만 하는 정책이 아니라 어느 지역이든 추진할 수 있는 정책”이라면서 “울산에서도 추진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이어 “자동차산업의 임금을 낮춰 국내 자동차 생산을 늘리고 이를 통해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 ‘광주형 일자리’의 핵심”이라면서 “울산 실정에 맞는 ‘울산형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 송철호 울산시장과 긴밀히 협의하고 지원하겠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 올해 세번째 정의선 수석부회장과 만나...광주형 일자리 잇단 '압박'성 발언
정의선 수석부회장을 비롯 정부부처 장관 등 80여 명이 참석한 자리였던 터라 정 부회장은 상당한 심적 압박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는 관측이 나온다.
정 수석부회장은 이 자리에서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정 수석부회장은 지난 15일에도 청와대에서 열린 '기업인과의 대화'에서 문 대통령과 마주했던 상황이어서 곤혹스러울 수 있다.
고민정 청와대 부대변인은 이날 정의선 수석부회장 발언 여부에 대해 "그분께서는 발언을 하시는 않았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문 대통령은 지난 10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신년기자회견에서도 광주형 일자리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문 대통령은 “현대자동차가 한국에 새로운 생산라인을 설치한 것이 얼마나 됐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까마득하다”면서 “현대차는 줄곧 외국에 공장을 새로 만들기는 했어도 한국에 생산라인을 새롭게 만든 것은 없었다”고 말했다.
이는 국내에 공장을 건설하라는 직접적인 압박성(?) 발언이나 다름없다.
또한 문 대통령은 지난 2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열린 '2019년 기해년 신년회'에서도 광주형 일자리를 언급했다.
문 대통령은 "광주형 일자리는 우리 사회가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상생형 일자리 모델을 만들 수 있을지를 가늠하는 척도가 될 것"이라며 "광주형 일자리는 결코 광주지역의 문제가 아니다. 새로운 일자리의 희망이 될 것이라 믿는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이 신년사를 하는 동안 정의선 현대차 수석부회장과 이재용 부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등 4대 그룹 총수가 한 테이블에 앉아 가만히 듣고 있었다.
문 대통령을 필두로 정부가 새해부터 ‘광주형 일자리’를 강하게 재촉하고 있어 현대자동차그룹으로서는 부담이 커지는 형국이다. 문 대통령이 정의선 수석부회장과 만난 것만도 올해 세번이나 된다.
문 대통령이 연초부터 현대차가 국내에 공장을 지어야 한다고 직접 밝히는 등 드라이브를 거는 것은 현 정부의 국정 제1과제가 일자리 창출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고용 상황이 날로 악화되고 있어 그 해법으로 '광주형 일자리'를 강하게 밀어부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광주형 일자리는 아직 타결을 짓지 못했다. 광주시는 그간 지역주도형 청년 일자리 사업을 추진해왔다. 오는 2022년까지 광주시 빛그린산업단지에 연간 10만대의 경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를 생산하는 공장을 지어 청년들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취지다.
지난해 광주시와 현대차는 신공장 건립에 대한 협상을 진행해왔다. 하지만 6개월간의 협상은 이견 차이를 좁히지 못한 채 현재 표류 중이다.
사실 ‘초임 연봉 3500만원, 근로시간 주 44시간’ 조건으로 완성차 공장을 만든다는 광주시 제안은 현대차에게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현대차 울산공장 근로자 평균 임금의 ‘반값 연봉’에 차를 생산하고 일자리를 창출하기 때문.
노조 문제 등 정치논리로 광주형 일자리 표류..."현대차 구조조정 필요한 시점"
그렇지만 논의 과정에서 민주노총, 한국노총 등 노동계의 개입으로 당초 취지는 퇴색했다. 현대차는 원안대로 협상하자는 입장이었으나 광주시 협상단은 ‘주 40시간 근무 시 3500만원에 특근비 지급’ 등을 수정 요구했다. 또 협상 조건에 포함됐던 ‘5년간 임금·단체협약 유예 조항’을 삭제해 버려 향후 임금 인상 여지를 남겨 놨다.
가뜩이나 완성차 생산직의 임금이 지나치게 높아 '귀족 노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부담스런 상황에서 현대차가 난색을 표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광주형 일자리 총파업까지 거론한 울산 노조의 반발도 현대차 입장에선 부담 요인이 됐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서로 입장이 다른 것도 문제다.
국내 자동차산업은 ‘고임금 저효율’ 구조에 빠져 글로벌 경쟁력이 추락하고 있다. 현대차가 동남아 지역 등 ‘저임금 고효율’ 시장에 신공장을 물색하는 이유다. 민주노총 소속 현대차 노조는 국내 경차 수요가 부진한데 경차 공장을 짓는 것은 공급 과잉은 물론 ‘광주형 일자리’ 사업이 성공할 수 없다며 정부를 비판하고 있다.
기업인 출신인 이언주 의원은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은 과거와 달리 이제는 노조 문제가 기업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라며 “현대자동차는 희망퇴직을 받아야 할 정도로 구조조정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밝혔다.
업계 관계자는 "국내 자동차산업이 경쟁력 상실로 위기인데 무리하게 공장을 지으라고 정부가 압박하는 것은 문제"라며 ”정부와 노조가 정치 이익 논리에 빠져 신뢰를 잃은 광주형 일자리는 그만 두는 게 낫다”고 비판했다.
현대차로서는 광주형 일자리는 해법을 찾기 힘든 난제다. 정부는 압박하고 있고 노조는 반대하고 또 다른 노총은 임금 인상을 벌써 따지고 있으나 난감하다.
더욱이 정의선 수석부회장으로서는 현대차 총괄을 맡아 그룹 지배구조 개편, 미국의 자동차 관세 부과 등 숙제가 산적해 있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 4년간 표류하던 삼성동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 건립사업을 풀어준 데 이어 17일 '수소경제 활성화'로 현대차그룹에 당근을 내밀었다. 한편으론 현대차에 국내 공장 건설을 재촉하는 셈이다.
재계 관계자는 "정부가 노조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기업에만 압박을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면서 "현대차, 삼성전자 등은 글로벌 시장에서 국가대표 기업으로서 경쟁해야 하는 상황인데 국내에서 경쟁력을 상실하도록 발목을 잡아선 안된다"고 말했다.
박근우 기자 lycaon@greened.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