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의경 신산업경영원장
큰산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이 서거하였다. 향년 88세.
1954년 최연소로 만 27세에 제3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이래 61년 동안 아홉 차례 국회의원, 그리고 제14대 대통령을 역임한 거산(巨山)은 한국 정치사(政治史), 나아가 현대사(現代史)의 표본이다.
그는 38세에 통합 야당인 민중당의 최연소 원내총무를 맡는 등 제1 야당의 원내총무를 5번 지낸 통합과 설득의 정치인이며 용기(勇氣)와 신념(信念)의 화신이었다.
김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을 듣고 빈소를 찾아 온 김종필(JP) 씨는 『YS는 신념의 정치인이었다』며 눈물을 흘렸다. 평생 상반된 정당에서 또는 김대중 씨(DJ)와 함께 「3김 경쟁시대」를 풍미했던 사람의 증언이다.
그의 평생에 걸친 투쟁으로 한국은 31년의 긴 군사독재 체제를 탈피하고 민주화 시대를 확고히 다지게 되었다.
1979년 10월4일 우리 한정사 상 최초로 야당 총재직을 박탈당하고 국회에서 의원직 제명을 당했을 때 그는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명언(名言)을 남겼다.
그로부터 12일 후 거산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과 마산에서 이른바 부마(釜馬)민중항쟁이 벌어졌고,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10․26사태가 빚어져 18년6개월의 박정희 시대가 막을 내렸다.
1980년 봄 민주 정부의 탄생을 기대하며 세 김 씨가 벌인 경쟁도 한 순간 5․18 광주사태를 빌미로 신군부가 집권함으로써 국민들의 희망이 꺾였으나 이를 극복한 정치 지도자도 거산이었다.
3년 동안 가택연금을 당했던 거산은 5․18 3주년을 맞아 단식투쟁에 돌입했고 무려 23일 동안 이를 지속했다. 초인적 의지였다.
1984년에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발족, 공동의장이 되었으며 이듬해 신한민주당 상임고문으로 추대되어 총선 승리를 이끌었다. 1985년 2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예상을 뒤엎고 신민당이 압승함으로써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됐으며 민주화 열기가 거세게 일어났다.
결국 1987년 6․29선언으로 신군부의 민정당이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함으로써 국민 모두가 대통령을 뽑는 데 참여케됐다.
그 후 1989년 총선에서 국민회의에 제1 야당 위치를 잃게 된 YS총재의 통일민주당은 민정․민주공화당과 3자 합당하여 민주자유당을 창립하고 거산이 대표로 취임했다.
이 때 야권 일각에선 YS가 민주화 투쟁을 포기하고 개인의 영달(榮達)을 꾀했다고 비난했으나, 거산은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로 들어 간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그 후 이 정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와 당선됨으로써 1993년 제14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으며, 결국 신군부의 전두환․노태우 대통령을 단죄했다. 호랑이를 잡은 셈이다.
거산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부정부패 척결」을 다짐했으며 역사를 바로 세우겠다고 했다. 자신부터 제산을 공개하면서 고위 공직자 재산신고 제도를 시행했다. 또한 금융실명제를 전격 단행하여 기업인․관리들을 비롯하여 국민 모두에게서 부정부패의 소지를 없앴다.
그는 산업화․민주화 시대 이후 자신의 소명을 선진화․세계화로 내 걸고 국제 기준에 맞춰 경제를 자유화하고 시장을 폭넓게 개방하였다. 그 결과 OECD 가입,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 체결 등 세계경제로의 편입을 촉진했다.
이로써 한국은 이제 연간 무역 규모 1조 달러로 세계 10위권 국가가 됐으나, 그 당시엔 부작용도 있었다. 1997년의 IMF 구제금융 신청이다. 외화 부족으로 빚어진 위기였지만, 그 원인은 1996년 정리해고를 가능케 한 노동법 개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키고도 야당과 노동계가 반대한다고 해서 취소한 게 화단(禍端)이었다.
가뜩이나 불황인 때에 과잉 노동 인력을 유지하며 끝없이 노사분규가 지속되자 한보․삼미특수강․기아자동차 등이 부도를 냈고, 해외 신용평가가 급격히 악화됐다.
지금까지 IMF사태에 대한 탓을 지나치게 YS에게 돌린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지방자치 제도를 시행하고 군부 내 사조직「하나회」를 해체시킴으로써 군의 정치 참여를 원천 봉쇄한 일 등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큰 업적이다.
이제 YS시대를 재평가할 때가 되었다.
조원영 jwycp@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