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행 제조물 책임법 입증책임은 피해자에게 있어
-입증책임은 제조사가, 관련 자료 제출은 의무화돼야
-공정위, 기업측 입장 및 산업 생태계 고려할 때 신중해야
‘강릉 급발진 의심사고’로 제조물 책임법 개정이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가운데, 급발진 입증책임이 제조사로 전환될 수 있을지 관심이 집중된다.
<녹색경제신문>은 제조물 책임법 개정이 제기된 이유와 개정 가능성에 대해 자세히 짚어봤다.
■ 제조물 책임법 개정 논의가 시작된 이유는?
지난해 12월 강릉 홍제동에서 급발진 의심사고로 故 이도현 군이 숨지고, 운전자인 도현 군의 할머니가 크게 다쳤다. 사고 관련해 5차례의 경찰조사가 이뤄졌지만 아직까지 사고의 원인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다.
유가족측은 차량 제조사 ‘KG모빌리티(구 쌍용자동차)’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했고, 도현 군의 아버지 이 모씨는 ‘국민동의청원’ 사이트에 ‘결함 원인 입증책임 전환’ 관련 청원을 올렸다.
지난 2월 23일에 올라온 청원에 5일동안 5만 명이 동의하면서 해당 청원은 소관위원회에 회부됐다. 이 씨는 급발진 의심 사고 발생시 입증책임을 자동차 제조사가 지도록 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이다. 비전문가인 운전자와 유가족이 차량의 결함을 입증하는 것은 불합리하고 불공정하다는 것이다.
이후 국회의원들도 제조물 책임법 개정과 관련된 법안을 제안했다. 정우택·박용진·허영 의원 등은 고도의 기술이 적용된 자동차 급발진 사고의 원인을 비전문가가 입증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며 입증책임 전환을 촉구했다.
■ 현행 제조물 책임법으로 급발진을 입증할 수 있나?
급발진 의심 사고 원인이 정확하게 밝혀진 사례는 전 세계적으로 찾아보기 힘들다. 심지어 국내 민사재판에서 급발진 의심 사고의 원인이 차량 결함이라고 인정된 사례는 ‘0건’이다.
현재 진행 중인 민사재판 중 ‘대전 급발진 의심 사고’가 유일하게 차량 결함이 인정된 사례다. 2심에서 재판부는 BMW 차량의 결함을 사고 원인으로 판단했고,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물론, 형사재판에서 차량 결함으로 인한 급발진의 ‘가능성’을 인정한 적이 있지만, 극히 일부의 형사재판에서 운전자의 무죄를 판결한 것에 불과하다.
수 백건이 넘는 급발진 의심 사고가 발생했고, 사고로 운전자나 동승자가 죽거나 다쳤지만 차량의 결함이 명확히 인정된 적은 없다. 급발진 의심 사고 차량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도 제대로 된 보상을 받을 수 없어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故 이도현 군이 숨지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하면서 급발진 사고의 원인을 제조업자가 찾아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가 거세지고 있다.
■ 제조물 책임법은 어떻게 개정돼야 하나?
강릉 급발진 의심 사고의 유가족 이 모씨는 제조물 책임법 개정으로 급발진 의심 사고 발생시 자동차 제조사가 결함을 입증하도록 입증책임이 전환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고를 당한 것도 억울한데 사고 원인 규명을 왜 사고 당사자가 해야하는지 이해할 수 없고, 소프트웨어 결함은 발생한 후 흔적을 남기지 않기 때문에 입증이 사실상 불가능한 것 아니냐는 의견이다.
다수의 국회의원들도 입증책임 전환에 관한 제조물 책임법 일부개정법률안을 제안했다.
정우택 의원은 입증책임 전환을 위해 제조물 책임법 제4조의2 신설을 제안했다. 정 의원은 고도의 기술력을 요하는 제조물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제조물을 제조·가동한 제조업자는 손해배상청구의 소에서 고의 또는 과실이 없음을 증명하도록 규정해야한다는 주장이다. 이를 통해 공평의 관념에 입각해 입증책임을 재분배하고 피해자를 더욱 두텁게 보호해야한다고 설명했다.
박용진 의원은 내연기관 등 동력발생장치 또는 컴퓨터·통신·자동화 등 전자적 장비와 그 주변장치를 활용한 제조물의 경우 제조물의 결함으로 생명·신체·재산에 손해가 발생했을 때 제조업자가 손해배상책임을 면하기 위해서는 해당 제조물을 공급할 당시 결함이 없었고, 그 제조물의 결함으로 인해 손해가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허영 의원은 손해핵 산정에 필요한 자료제출 의무화 및 입증책임 전환과 관련해 제3조 및 제4조의2 신설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허 의원은 손해배상청구 소송에 법원의 자료제출명령제도를 도입해 제조업자가 영업비밀이라 하더라도 결함·손해의 증명 또는 손해액 산정에 반드시 필요한 자료제출을 거부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제조물이 ‘자동차 관리법’의 적용을 받는 자동차인 경우에는 그 결함 및 손해의 입증책임을 자동차 제조업자가 지도록 하는 특례를 둠으로써 피해자의 입증 부담을 완화하고 피해구제의 실효성을 제고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 제조물 책임법 개정은 어떻게 이뤄지고 있나?
지난달 22일, 국회 정무위원회 법안심사 제2소위원회에서 제조물 책임법 개정과 관련해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됐다.
다수의 위원들은 급발진 의심 사고 발생시 피해자가 자동차 결함을 입증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피해자가 입증책임을 져서 급발진 의심 사고의 원인을 밝혀낸 경우가 극히 드물기 때문에 제조사가 입증책임을 지면 사고의 원인을 밝혀낼 수 있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또한 현행법상 피해자들이 정확한 사고 원인을 파악하거나 피해 구제를 받는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입증책임 전환을 통해 피해자에게 유리한 입법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피해자들을 포함한 5만 명이 넘는 국민들이 이 문제로 불안해 하고 있고, 국민 청원까지 나왔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다.
윤수현 공정거래위원회 부위원장은 제조물 책임법 개정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제조물 책임법을 담당하는 부처다. 윤 부위원장은 법원의 자료제출명령 제도 도입을 통해서 피해자가 입증하는 부담을 줄여주자는 것은 수용할 수 있으나, 완전히 다 제조업자가 입증책임을 지라고 하는 것은 좀 더 검토가 필요하다고 입장을 밝혔다.
윤 부위원장은 자동차 급발진 손해배상책임과 관련해 사회적으로 쟁점이 된 후 연구용역을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입증책임 완화 등을 포함한 연구용역 결과가 올해 안으로 나올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공정위는 국토부와 여러 논의를 통해 급발진 문제에 대한 대책을 찾고 있고, 법무부와는 손해배상책임과 관련된 부분에 대해 논의하겠다는 계획도 전했다.
일부 위원들은 공정거래위원회측이 기업들의 입장만 고려하고 소비자들의 이익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이에 윤 부위원장은 공정위가 신속하게 해당 문제를 완화하거나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겠다고 답했다.
한편, 소위원회측은 제조물 책임법 일부개정법률안과 급발진 의심 사고 발생시 입증책임 전환에 관한 청원을 심도있게 심사한다는 계획이다.
박시하 기자 lycaon@greened.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