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미국 증설하면서도 투자 총량은 제한
[녹색경제신문 = 정창현 기자] 글로벌 메모리 업체들의 생산능력 확대 여부가 중장기 경쟁력을 좌우할 핵심 변수로 부상하고 있는 가운데, 마이크론이 일본과 미국 생산거점 증설에 속도를 내고 있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대규모 국내 증설에 맞서 적극적인 장기 계약과 캐파 확대를 동원하는 모양새다.
업계에 따르면 최근 마이크론이 내세우는 수요 확보 전략의 핵심은 장기공급계약 SCA(Strategic Customer Agreement)다. 마이크론의 최근 실적발표 내용에 따르면 회사는 현재까지 16개 고객사와 3~5년 단위 SCA를 체결했다. 계약이 체결된 물량은 전체 D램 판매량의 약 20%, 낸드 판매량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규모로 알려졌다.
계약은 구매자가 물량을 줄이거나 인수하지 않더라도 정해진 대금을 지급하는 ‘Take-or-Pay’ 방식으로 체결됐다. 계약 기간 전체 최소 가치는 1000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졌다. 안정적인 수요를 미리 확보하면서 대규모 생산설비 투자에 대한 불확실성을 줄인 셈이다.
이처럼 확보한 계약 물량을 기반으로 생산능력 확대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마이크론은 지난 4일(현지시간) 일본 히로시마 공장에서 확장 공사 기공식을 열었다. 투자 규모는 1조5000억엔(약 14조원)으로, 기존 공장 부지에 신규 제조동을 건설해 HBM 등 AI 메모리를 생산할 계획이다. 출하 시점은 2028년 여름으로 예상된다.
히로시마 공장은 마이크론이 2013년 엘피다메모리 인수로 확보한 생산거점이다. 산제이 메흐로트라 마이크론 최고경영자(CEO)는 기공식에서 마이크론의 첫 HBM용 웨이퍼가 이곳에서 생산됐다는 점을 언급하며 공장의 상징성을 강조했다.
일본 정부도 마이크론의 생산기지 확대를 적극 지원하고 있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히로시마 공장 건설 비용 지원을 위해 최대 5000억엔을 배정했으며,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도 2041년 3월까지 반도체·AI 분야에 101조6000억엔 규모의 민관 투자를 추진하는 로드맵을 발표했다.
미국에서도 생산능력 확대가 이어지고 있다. 마이크론은 아이다호주 보이시에 최첨단 생산시설 2곳을 건설 중이며, 지난 1월에는 뉴욕주 시러큐스 인근에서 1000억 달러 규모 반도체 생산시설 착공식을 개최했다.
주목할 점은 공격적인 증설에도 투자 총량은 통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이크론은 최근 실적발표에서 지난해 공개한 2000억 달러 규모의 생산능력 및 연구개발(R&D) 투자 계획을 증액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최소 1000억 달러 규모의 수요 계약을 확보하고도 공급 확대에는 신중한 태도를 유지한 셈이다.
수요를 계약으로 미리 확보하는 흐름 자체는 국내 메모리 업체들도 다르지 않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역시 HBM을 중심으로 장기공급계약(LTA)을 확대하며 생산 물량을 사전에 판매하는 구조를 강화하고 있다.
마이크론과의 차이는 얼마나 먼 미래의 수요를 보고 생산능력을 확보하느냐다. 앞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정부 주도의 반도체 메가 프로젝트에 따라 한국 서남권에 팹 4기를 포함한 약 5200억 달러 규모 신규 시설과 530억 달러 규모 패키징 시설을 구축하고, 향후 10년간 신규 시설에 합산 약 2000조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반도체 클러스터 증설이 10년 가량에 걸쳐 진행되는 만큼 후반부 생산시설이 본격 가동되는 시점은 현재 체결된 장기공급계약의 계약 기간을 훨씬 넘어선다. 마이크론은 SCA 체결 이후에도 투자 총량을 늘리지 않은 반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계약 기간 너머의 AI 메모리 수요까지 고려해 생산능력을 선제적으로 확보하는 전략을 택한 것으로 해석된다.
업계에서는 이러한 양상이 AI 시대 메모리 산업의 투자 방식이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분석한다. 과거에는 수요 증가를 예상하고 생산능력을 먼저 확보하는 것이 경쟁력의 핵심이었다면, 이제는 장기 계약으로 수요를 확인한 뒤 그에 맞춰 생산능력을 늘리는 방식도 하나의 전략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향후 메모리 시장의 경쟁은 단순한 캐파 확대보다 계약을 통해 확보한 수요와 미래 성장성을 얼마나 균형 있게 반영하느냐에 따라 갈릴 가능성이 크다는 평가가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AI 메모리 시장에서는 장기 계약이 보편화되면서 생산능력 확보와 함께 그 투자가 실제 수요로 얼마나 뒷받침되는지 여부가 중요한 경쟁 요소가 될 것”이라며 “마이크론은 투자 총량에 일정 제한을 두는 전략을 택했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장기 수요를 선제적으로 반영해 생산능력을 확보하는 전략인 만큼 향후 시장 상황에 따라 각 전략의 성과가 갈릴 수 있다”고 말했다.
정창현 기자 lycaon@greened.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