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매출의 75% 가격 범위 확정, 대부분 상·하한 밴드 적용
[녹색경제신문 = 정창현 기자] 미국 메모리반도체 업체 마이크론이 고객사와 최소 구매 물량에 대한 대금 지급을 보장받는 장기공급계약을 잇따라 체결하고 있다. 메모리 공급 부족이 이어지면서 고객사가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먼저 자금을 맡기는 구조가 확산되면서, 메모리 공급업체의 시장 협상력이 강화되는 모양새다.
최근 마이크론은 실적발표 컨퍼런스콜을 통해 4분기까지 총 26건의 전략적 고객 계약(SCA)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SCA는 다년간의 구매 의무를 포함한 장기 공급 계약이다. 마이크론의 모든 SCA에는 ‘테이크 오어 페이(take-or-pay)’ 조건이 적용됐다. 고객사가 계약에서 약속한 최소 물량을 실제로 구매하지 않더라도 해당 최소 물량에 대한 대금을 지급해야 하는 방식이다.
26건의 SCA와 계약 연장을 포함한 고객사의 재무적 약정 규모는 320억달러(약 43조3920억원)로 집계됐다. 대부분 현금 예치금 형태로 이뤄졌으며, 마이크론은 4분기에만 123억달러(약 16조6788억원)의 고객 예치금을 받았다. 4분기 말 기준 고객 예치금 잔액은 127억달러(약 17조2212억원)다.
이 예치금은 회계상 매출로 인식되는 금액이 아니라 재무활동 현금흐름으로 분류된다. 마이크론은 고객의 최소 구매 조건이 충족되면 계약 후반부에 이를 돌려줄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가격 조건도 상당 부분 미리 정해졌다. 마이크론은 2030년까지 SCA를 통해 발생할 매출이 전체 매출의 35%를 웃돌 것으로 예상하고 있으며, SCA 가운데 약 75%는 가격 산정 방식이 확정됐다. 대부분의 계약에는 일정 범위의 가격 상·하한선을 설정하는 가격 밴드가 적용됐으며, 나머지 계약은 시장 가격을 바탕으로 주기적으로 가격을 협상하는 방식이다.
마크 머피 마이크론 최고재무책임자(CFO)는 “가격 하한을 적용하더라도 마이크론의 마진이 과거 메모리 업황 최고 수준을 의미 있게 웃돌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산제이 메흐로트라 마이크론 최고경영자(CEO)도 “최근 체결되는 SCA의 가격이 현재 시장 상황과 전망을 반영해 높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마이크론의 수주잔고(RPO)는 약 1500억달러(약 203조4000억원)에 달한다. RPO는 이미 계약을 체결했지만 아직 매출로 인식하지 않은 금액을 뜻한다. RPO에는 가격 조건이 확정된 SCA만 반영되며, 계약된 물량과 최소 가격을 기준으로 산정돼 실제 매출은 RPO를 크게 웃돌 수 있다는 게 마이크론 측 설명이다.
계약 기간도 길어지고 있다. 일부 SCA는 2031년까지 연장될 수 있으며, 이미 기존 계약 2건이 2031년까지 1년씩 연장됐다. 고객사들이 2030년 이후까지 안정적인 메모리 공급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면서 장기 계약 기간이 확대되는 모습이다.
장기계약 확대의 배경으로는 메모리 업계의 공급 부족이 꼽힌다. 마이크론은 2027년과 2028년 낸드플래시 비트 출하량 증가율을 20%대 중반, D램은 20%대 초반으로 예상하면서 두 해 모두 공급이 제약될 것으로 내다봤다. 최소 2028년까지는 공급 부족이 이어질 것이라는 의미다. 공급과 수요가 균형을 이루는 시점도 아직 가시권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밝혔다.
마이크론은 2027년 생산량의 75% 이상을 이미 계약한 상태이며, 최근 고객사와의 논의 중심도 2028년 물량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SCA를 통한 매출 비중은 2030년까지 약 50% 수준으로 유지하면서 고객사와 최종 수요처별 물량 배분의 유연성도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마이크론의 SCA 확대는 단순히 개별 업체의 수주 확대를 넘어 메모리 시장의 공급 구조가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풀이된다. 공급 부족이 이어지는 동안 고객사들은 장기간의 물량을 선점하려 하고, 메모리 업체들은 이를 기반으로 생산계획과 투자 규모를 구체화하면서 공급업체의 협상력이 높아지는 구조가 이어질 전망이다.
한편 국내 메모리 업체들도 장기적인 고객 수요 확보와 공급 안정성 강화에 나서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지난 2분기 실적발표 컨퍼런스콜을 통해 약 10개 주요 고객사와 5년 단위의 장기공급계약(LTA)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삼성전자 역시 글로벌 상위 5개 데이터센터 고객과 LTA를 이미 체결했으며, AI 관련 수요를 지원하기 위해 추가 5개 주요 고객과도 최종 협상 단계에 있다고 밝혔다.
메모리 업계 관계자는 “AI 서버를 중심으로 메모리 수요가 빠르게 늘어나는 상황에서는 고객사 입장에서도 필요한 물량을 미리 확보하는 것이 중요해지고 있다”며 “국내 업체들도 고객사와의 장기 공급 관계를 강화하면서 안정적인 수요를 확보하는 전략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정창현 기자 lycaon@greened.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