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가 변해야 나라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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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가 변해야 나라가 산다
  • 조원영
  • 승인 2015.12.30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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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경영인클럽(회장 김동욱 전 국회 재경위원장)은 지난달 18일 서울 중구 플라자호텔에서 「한국 정신문화의 재점검」을 주제로 서지문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초청 조찬회를 개최했다. 강연 내용을 요약한다. <편집자>

위기의 국가 현실

오늘날 우리나라 상황은 많은 사람들에게 전과 다른 위기감을 주고 있다. 예전에도 지독한 부정부패, 초대형 비리가 드러날 때, 이 나라가 이런 식으로 가서야 오래 버틸 수 있겠느냐는 망국론이 일곤 했지만 그래도 나라가 와해되기야 하겠는가 하는 마음이 한 구석에 있었다.

80년대에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벌어졌던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만 하더라도 그 격렬함 때문에 학생들이 끌려 가서 고초를 겪는 것이 안타까웠지 그 시위 때문에 나라가 무너져 내릴까 하는 염려는 하지 않았다. 심지어 1997년 외환위기 사태 때도 국민 생활의 질이 무참하게 낮아지는 것을 근심했지, 나라가 아주 망해 입법·사법·행정부의 기능이 마비되고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야만사회가 될까봐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현재의 분위기는 우리나라가 국가로서 더 이상 기능을 할 수 없게 될 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크다. 국회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행정·사법부의 영역까지 침범함으로써 국가 기능을 마비시키며, 사법부 역시 구성원의 자질이 저하되고 있어 비상식적이고 기이한 판결이 나오고 있다.

그래서 민생을 직접 챙겨야 할 행정부는 심히 위축되었고, 사명감이나 성취 욕구를 잃고 눈치 보기와 무사안일 주의로 일관하게 된 지 오래다. 그러니까 3부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국민의 삶은 어느 곳의 소관도 아니게 되었다는 느낌이다. 이런 형편에 노조는 나라를 쇠 파이프로 깨 부수고 짓이겨 버리겠다는 기세로 날뛰면서 그야말로 제 4부, 아니 초법적 최상위 권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대통령도 너무 힘이 없는 것 같은데 사방을 둘러 보아도 뛰어난 능력이나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이 없어서 우리나라가 「무주공산」이 된 것 같고 나라를 전복하려는 세력에게 통째로 먹히기 쉽겠다는 느낌도 받는다.

 

우리나라는 해방 후 70년 동안 정말 눈부신 발전을 해서 국민의 평균 수명이 2배, 소득은 500배 이상으로 늘었다. 이는 국민이 열심히 일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부의 과감한 기획과 추진력이 아니었으면 결코 달성될 수 없었던 「기적」이었다 그럼에도 국가와 정부의 공로는 잊혀졌고, 정부의 국민 통솔력은 바닥에 떨어졌다.

두 갈래 아우성

그 동안 끊임없는 비리에도 불구하고 국운에 대한 불안이 적었던 것은 경제가 꾸준히 성장해 준 덕이었다. 우리나라는 1961년 이래 반세기 동안 수출에 기대어 경제가 도약하고 발전해 왔는데 이제 국제무역 환경도 나빠지고 우리 제품들이 고가 상품은 고가 상품대로, 저가 상품은 저가 상품대로 경쟁력을 잃고 있는 데다 우리 정치는 경제를 회생시킬 방법을 모르거나 아는 방법도 오히려 가로막고 있으니 경제가 위축되고 병들 수밖에 없다.

마침내 지난 11월 27일에는 전국의 경제학 교수, 경제 전문가를 주축으로 하는 지식인 1,000명이 우리나라의 현 상황이 「미증유의」경제위기로서 1997년 IMF사태를 앞뒀던 때와 비슷한 상황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정치인들이 정파적 이익의 포로가 되어 경제를 희생양으로 만들지 말고 신속히 경제활성화 법안을 통과시켜 청년 실업자를 구제하고 노동시장을 개혁하여 고용이 원활하게 할 것을 촉구했다.

한 나라의 경제위기는 1973년도 오일 쇼크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처럼 순전히 국외에서 발생한 요인 때문에 유발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경제위기는 국내적 경제정책의 실수, 또는 국내 정치의 혼란과 무능에 기인하는 경우가 더 많다. 오늘날 한국 경제는 좌파와 노조들이 나라 경제의 숨통을 옥죄고 있어 호흡 곤란에 빠진 형국이다. 그리고 우리 정부와 정치권은 이살기등등한 좌파와 민주노총을 설득할 능력도 제압할 힘도 없다.

더구나 적대적 이웃이 바로 수도 서울의 100km 북방에 존재하고 있는 데도 우리의 내부의 친북 세력이 우리 사회를 교란시키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 지난 11월 14일의 소위 「민주」노조 주도의 도심 시위는 「침략자의 만행」을 연상시켰다.

시위의 주도자인 한상균이 시위대에게 “나라 전체를 마비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을 지시했으니, 이들이 「내부의 적」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지금 60대 이상 국민은 1960년 4·19 혁명 이후에 1년 이상을 우리 사회가 해결하거나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는 온갖 욕망의 아우성이 날마다 터져 나와 나라가 그야말로 「마비」되었던 때를 기억할 것이다. 1980년 「서울의 봄」 역시 우리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이 간절했던 만큼 많은 국민이 호응했지만 이런 식의 동요를 우리 사회가 지탱할 수 있을까 하는 위기감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 사실이다.

1960년과 80년의 사회 혼란은 정부가 약해진 틈을 타서 너도나도 자기 요구를 관철시켜야겠다는 다급한 충동의 발현이었다면, 최근 몇년 간의 시위는 나라를 벼랑 아래로 밀어 붙이겠다는 살의가 느껴진다는 것이 차이일 것이다.

왜 우리의 「민중」은 나라를 그토록 겁없이 상처내고 때려 부수고 마비시키기를 서슴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다분히 우리 국민성 탓이라고 생각된다. 이 국민성을 형성한 것은 수천 년의 역사적 경험이다.

한국인의 민족성

한국의 국민성을 논할 때, 우리의 삼국시대가 신라에 의해 통일된 것이 무척 유감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고구려에 의해 통일이 되었더라면 넓은 만주 땅이 오늘날 우리 국토가 되었을 것이고, 고구려의 용맹하고 진취적인 기상이 우리의 국민성이 되었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런데 고구려 벽화에 나타난 고구려인들은 활달하고 용맹해 보이는데, 사서(史書) 삼국지(三國志)의 저자 진수(陳壽)가 저술한 「위지동이전」에는 고구려인들은 「성격이 흉악하고 급하여 침략과 노략질을 즐긴다(其人性兇急 善寇鈔)」고 기술되어 있다.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시해하고 시체를 토막내어 버리고 자기에게 대적할 만한 귀족 100여 명을 연회장에서 학살한 연개소문을 보면 그럴 듯한 말이다.

우리 국민성이 무력하고 소극적이라고 싫어하는 사람은 흉악함이 무기력보다 낫다고 생각할 지 모르겠으나, 연개소문이 왕을 죽이고 귀족들을 몰살할 때 고구려의 서민들은 숨조차 쉬지 못 하고 땅에 엎드려 살았을 것이다.
신라와 백제 역시 잦은 왕실 쿠데타의 혼란 속에서나 왕실과 귀족들의 사치를 뒷받침하기 위해 민초들의 목숨은 기약이 없고 대대로 헐벗고 굶주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 민족성을 고찰해 보면 우리 민족은 토의를 통한 합의 도출이 매우 어렵고, 또한 도출한 합의를 지키려는 의지가 매우 미약한 민족이라고 생각한다. 세계에 이런 민족은 매우 많은데 공교롭게도 이들 대부분이 후진국이다.

이런 국민은 나라의 상황이 좋지 않게 되었을 때 지혜를 모아 해결 방법을 찾기 보다는 자기 보위의 해결 방법이 옳다고 서로 우기다가 결국 과거의 조선, 중국, 인도, 기타 수많은 문명들처럼 외세에 먹히거나 또는 현대의 그리스나 스페인처럼 외세에 의해 구출된다.

반면에 소수 선진국의 경우는 어떠한 돌발적 대재앙 또한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냥 그 나라가 발을 헛디뎌 고랑에 처박힐 일은 없어 보인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 나라들의 제도가 건전하고 튼튼하기 때문이고, 그 제도를 운용하는 국민들의 상식이 굳건해 보이기 때문이다. 즉, 오늘날 선진국이 된 나라들과 후진국이 된 나라들의 국민성이나 사회제도, 인식 등에는 확실한 차이가 있다.

유교국가의 빛과 그림자

고려시대는 불교국가로서 불교문화가 꽃폈고, 유교적인 억압이 자리 잡기 전이어서 국민들은 「연등회」, 「팔관회」 등 축제를 즐겼으나, 「무신의 란」 등이 일어나 정치가 문란해져 국민의 삶이 팍팍해졌을 것이다.

그런데 본인 견해로는 우리 민족성이 왜곡되게 된 우리 역사 최대의 비극은 조선의 건국이었다. 물론 우리나라가 조선 건국과 함께 물질적으로 고려 때보다 더 못살게 되었거나 사회부조리가 더 심해졌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 민족이 19세기 말에 국체를 보전할 수 없을 만큼 후진적인 민족이 된 것은 조선의 건국, 즉 정확히는 「유교국가화」가 주원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유교국가가 만들어 낸 사회 부조리는 우리 국민정신을 21세기에도 후진적인 민족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버너드 쇼(1856-1950)는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는 비겁하다. 그러나 그에게 이념을 주입하면 그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죽음에도 뛰어들 만큼 용감해진다”고 말했다. 만고의 충신이 된 양반들은 원래 바탕도 남달랐겠지만 유교가 길러낼 수 있었던 인간형이었다. 기독교는 그보다도 고행의 강도가 심한 성자, 은자(隱者), 순교자, 십자군 용사를 무수히 배출했다.

유교문명에서 사대부와 그들의 특권은 그들로 하여금 백성을 보호하고 계도하는 일을 제대로, 더 잘하게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누리는 특권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백성들을 보살피고 어루만지라는 게 공자의 지상명령인데 이를 망각하는 양반이 너무 많았다.

서구, 다원적 가치의 사회

서양도 중세까지는 기독교가 지배하는 단일가치의 사회였고, 단일가치 사회가 필연적으로 그렇듯이 지배자(교회와 성직자)의 부패와 횡포는 극심했다. 기독교의 이상과 가르침, 기독교 성직자들과 교회의 행동 사이의 괴리는 무수한 비판과 저항을 낳았지만 교회는 모든 비판, 저항세력에 「이단」이라는 딱지를 붙여 탄압하고 말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식자들을 중심으로 교회의 부당한 폭압에 저항하는 종교운동이 끊임없었고, 이는 관의 수탈 때문에 도저히 목숨을 유지할 수 없어 필사적으로 일어났던 조선조의 민란과는 약간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 민족성에, 우리 민족의 DNA에 남아 있는 이 원한, 그리고 비굴함과 간사함을 제거해야만 합리적으로 다스려지는 사회, 시민정신이 지배하는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

겉보기에 오늘날 우리의 민주 질서를 교란하는 세력은 우리 사회의 불이익 계층으로 보이고, 대체로 그렇기에 그들의 의식구조 개편이 선결 과제인 것 같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의 「지도층」이 그들의 특권을 내려 놓을 준비가 되어있는가,

그들의 의식이 진실로 민주적으로 개혁될 수 있는가이다.
현재의 좌파에게 대한민국의 체제적 우월성,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그들이 누리는 무수한 이점과 행복을 설득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보수가 변해도 가망이 없을까? 본인을 포함하여 보수가 변하는 것은 「좌파」를 변화시키는 것보다 더 힘들까?

어쨌든 보수는 나라를 살리고 자신들이 살기 위해 변해야 한다. 당장은 나라를 흔들고 때려 부수는 것이 좌파들이지만 방산비리라든가 성완종 사건, 조현아 사건 같은 보수 진영의 범죄를 없애지 않으면 나라는 바로 설 수 없다.

조원영  jwyc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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