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장비 기업에서 파견 온 현장 인력들의 이탈 가능성도...반도체업계 '비상'
- 장비 가동 중단 시 수율 바닥으로 떨어져...천문학적 피해 발생할 수도
국내 반도체업계가 일본 정부의 몽니에 몸살을 앓고 있다. 소재에 이어 핵심 장비 수급과 관리 여부도 불투명해 지면서 “일본 장비 업체 엔지니어들이 현장을 이탈할 수도 있다”는 우려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반도체 제조업계 관계자는 5일 녹색경제신문과의 통화에서 “일본 정부가 한국을 백색국가에서 배제하는 조치를 본격적으로 시행하면, 장비 수급에 차질로 생산라인 증설에 어려움이 발생할 것”이라며 “당장 내달부터 기존에 들여온 일본 반도체 장비 사후관리(A/S)에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걱정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하나에 수백억원에서 수천억원씩 하는 반도체 장비를 들여오면서, 통상적으로 공급사와 유지ㆍ보수에 관한 계약도 함께 체결한다.
일본 반도체 장비 기업들은 사후관리에 철저한 ‘일본 기업다운 모습’으로 유명하고, 기술력도 높아 업계에선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대표적으로 '도쿄 일렉트론'과 '스크린 세미컨덕터'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장비를 공급하고 있는 일본 기업으로 알려져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측은 “백색국가 배제에 대한 직접적인 수출 규제는 현재 시행되고 있지 않다”면서 “사후관리 부분에서 일본 기업의 문제는 아직 없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내부직원들 사이에선 “일본 정부의 눈치를 봐야하는 현지 기업들이 화이트리스트 배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되는 이달 말부터 사후관리 부문에서도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만연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반도체 제작 현장에선 핵심 장비 수급 차질에 더해 이미 들여온 일본산 반도체 장비의 관리까지도 문제가 확대될 수 있다고 보고 있는 셈이다.
반도체 생산라인의 특성상 하나의 장비에 이상이 생기면, 자칫 전체 생산을 멈춰야하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반도체 장비 공급사들은 고객사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생산 시설에 장비를 점검ㆍ보수할 수 있는 엔지니어 인력을 상시 배치한다.
업계 일각에선 일본 장비 업체들이 이 엔지니어들을 현장에서 이탈시키는 선택을 내릴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일본 정부를 7년 가까이 집권 중인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 정권에 눈치를 봐야하는 기업들이 최악의 선택을 내릴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 셈이다.
장비에 이상이 발생했을 때 일본 현지에서 수급해야하는 부품 조달이 늦어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일본 정부가 지난 2일 한국을 수출 심사 우대국인 ‘화이트리스트(백색국가)’에서 배제하는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을 단행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가 앞서 한 달간 반도체ㆍ디스플레이를 정조준해 수출 규제를 시행한 핵심 소재 3종을 비롯해 이번 화이트리스트 배제로 1383개 품목이 수출 제한을 받는다.
업계에선 반도체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이번 수출 규제 확대로 치명적 타격을 입을 수 있는 소재·부품·장비가 37개인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일본 기업에 전량 의존하고 있는 레이저 작동식 반도체 장비를 비롯해 실리콘 웨이퍼, 블랭크 마스크 등 핵심 소재가 ‘최대의 약점’으로 꼽힌다.
장비를 관리하는 인력 이탈이 현실화 되고, 문제가 발생한 장비 부품의 조달에 차질이 생기면 반도체 생산 설비가 중단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발생할 수 있다.
이 경우 천문학적인 손해가 발생한다. 반도체 공장 설비는 24시간 가동되는데, 한 번 중단됐다가 다시 장비를 돌리면 수율(합격품 비율)이 바닥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다시 정상치를 회복하려면 상당 시간이 소요된다.
실제로 지난해 3월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공장이 정전사고로 30분가량 작업이 중단됐을 때 발생한 손실액은 500억원으로 추정된다. 일주일이 넘게 가동이 중단되면 조 단위의 피해액이 발생하는 셈이다.
시장조사업체 가트너에 따르면, 2017년 일본 기업의 반도체 장비 세계 점유율은 28.2%로 세계 2위다. 미국은 44.7%로 독보적인 점유율을 보유하고 있다. 한국은 3.6%에 그쳤다.
실제로 지난해 반도체 제조용 장비 일본 수입액은 38억4200만 달러(약 4조5205억원)였다. 전체 120억1100만 달러(약 14조1321억원) 중 32%를 차지하는 금액이다. 일본 장비를 배제하고 사실상 반도체를 생산할 수 없는 것을 반증한 셈이다.
일본이 미국보다 점유율이 낮긴 하지만, 반도체 공정의 특성상 단 하나의 장비라도 문제가 발생한다면 생산이 불가하다. 더욱이 다른 장비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어 반도체 산업의 ‘불확실성’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이주완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연구위원은 “반도체 공정의 국산화율이 장비 20%, 소재 50%라고 하지만 이는 평균일 뿐”이라며 “반도체 공정에 필요한 20개 장비 중 진입장벽이 낮은 화학증착, 식각, 세정 등 3분의 1 공정에 업체들이 몰려 있어 아예 국산화가 안 된 장비도 많다”고 분석했다.
한편, 정부는 이 같은 일본 정부의 보복성 경제 조치에 대응해 '소재·장비 국산화'에 속도를 낼 수 있는 다양한 정책들을 발표하고, 시행하고 있다.
정두용 기자 lycaon@greened.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