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6년 에버랜드 전환사채 증여...이건희 회장 등 검찰에 고발
- 2018년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의혹'...'경영권 승계'로 수사 확대
- 법적 공방 '잃어버린 10년' 우려...이건희 회장 별세로 큰 변수 등장
1996년 10월 삼성 에버랜드 이사회의 전환사채 발행 의결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검찰이 벌이고 있는 25년 전쟁의 시작점이다. 일개 기업에서 행해진 '일상적인 경영 활동'이 한국 최고의 글로벌 기업을 가진 그룹의 오너 경영인을 옥죄며, 또 그룹 전체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을 일이었다.
이 부회장은 올 9월 1일 '삼성물산-제일모직 부정 합병 의혹'으로 불구속 기소됐다. 경영권 승계 관련를 둘러싼 검찰과의 '악연'이 여전히 진행 중이란 얘기다. 이 부회장은 아버지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경영권을 승계하는 과정에서 에버랜드 전환사채를 둘러싼 논란을 시작으로, 현재 진행 중인 '국정농단 사건'과 '삼성물산 합병 의혹'에 이르기까지 장구한 시간 동안 '사법 리스크' 전쟁을 치르고 있다. 이번 검찰 기소로 이 부회장과 삼성그룹은 지난 2017년 2월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 사건으로 구속 기소된 이후 3년 6개월 만에 다시 법정 다툼을 이어가야 할 형편이다.
이 부회장이 "자식에게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선언한 만큼 이번 기소는 경영권 승계와 관련해 검찰과의 '최후의 전쟁'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재계는 코로나19 사태 등 글로벌 불확실성 속에서 지금의 긴 법률 공방이 삼성에게 '잃어버린 10년'이 될까 우려하고 있다. 지난 25일 이건희 회장 별세는 큰 변수가 될 전망이다.
◆ 그날
이건희, 이재용 삼남매에 '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증여 의혹...25년 전쟁의 서막
1996년 10월 30일. 삼성에버랜드 이사회는 주당 8만5000원대인 에버랜드 전환사채(CB)를 주당 7700원에 125만4000여주(약 96억원) 발행하기로 결의했다. 이는 전체 지분의 62.5%에 해당한다.
이어 같은 해 12월 3일, 이건희 회장 등 개인 주주와 삼성전자, 제일모직, 중앙일보, 삼성물산 등 법인 주주들이 주주 배정을 포기했다. 그리고 에버랜드 이사회는 이재용을 비롯한 이건희 회장의 자녀 삼남매에게 실권주 전체를 배정했다. 당시 전무였던 이재용 부회장은 에버랜드 전환사채를 사들인 뒤 주식으로 교환해 에버랜드의 최대 주주에 등극했다.
이보다 1년 앞선 1995년 이건희 회장은 이재용 부회장에게 60억8000만원을 증여했다. 이재용 부회장은 당시 증여받은 금액으로 삼성그룹 비상장 계열사인 에스원의 주식 12만여주를 23억원, 삼성엔지니어링 주식 47만주를 19억원에 매입했다. 그리고 얼마 뒤 두 회사는 상장했다.
이 부회장은 두 회사의 보유 주식을 605억원에 매각한 후 이 자금으로 문제의 에버랜드 전환사채를 저가에 사들였다. 당시 이 부회장이 확보한 에버랜드 주식 지분은 31.9%다. 이부진 호텔신라 대표와 이서현 삼성물산 패션부문장(사장)의 보유분은 각각 8.37%로 세 남매의 지분의 합은 41.84%에 달했다.
또한 1998년, 에버랜드는 비상장회사인 삼성생명 주식을 주당 9000원씩 344만주를 매입했다. 그 결과 에버랜드가 보유한 삼성생명 지분은 2.25%에서 20.67%로 증가했다. 이어 삼성생명은 삼성전자 지분을 사들여 삼성전자의 최대주주가 됐다. 바야흐로 삼성에버랜드를 가지면 삼성생명과 삼성전자를 지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순환출자 상 삼성에버랜드가 삼성그룹의 지주회사격이 된 셈이다.
에버랜드는 1963년 동화부동산(주)으로 출발한 유원지 및 테마파크 운영업체였다. 삼성그룹에 속했다. 주요 사업은 레저문화사업, 리조트개발사업, 골프클럽 운영 및 컨설팅 사업, 푸드서비스 및 식재료 유통사업, 빌딩매니지먼트사업 등이었다. 회사는 2014년 7월 4일 제일모직으로 사명을 변경했고, 2015년 9월 삼성물산에 합병됐다.
◆ 그후
김용철 변호사 '비자금 폭로', '삼성 특검' 시작...이건희 회장, 대법원 무죄
삼성에버랜드가 이사회 개최를 당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전환 사채 처리 문제는 5년이 지나 세상에 소식이 알려지면서 빠르게 달궈시기 시작했다. 지난 2000년 6월, 당시 곽노현 방송통신대 교수 등 전국 법학과 교수 43명이 경영권 승계 목적으로 에버랜드 전환사채(CB)를 편법 발행해 상속한 혐의로 이건희 회장 등을 검찰에 고발했다.
이들은 "지난 1996년 12월 이건희 회장이 에버랜드의 전환사채(CB)를 현저하게 싼 가격에 발행하여 이재용 등 자녀들에게 인수하게 함으로써 삼성그룹의 지배권을 이전했다"고 주장했다.
검찰 수사는 배임 공소시효(7년) 직전인 2003년 12월까지 3년간 이어졌다. 당시 채동욱 특수2부장은 삼성 임원진인 허태학·박노빈 전 사장 2명만 불구속 기소했다. 이건희 회장은 재판에 넘겨지지 않았다. 당시 검찰은 삼성그룹 차원의 지시나 공모행위가 있었는지 밝히겠다고 했지만,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기소된 허태학·박노빈 전 사장은 법원 1심과 2심을 거쳐 결국 2007년 5월 유죄가 선고됐다.
그런데 수면 아래로 가라 앉은 것으로 여겨졌던 에버랜드 전환사채 사건은 전직 삼성 간부에 의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지난 2007년 10월 29일, 전 삼성 법무팀장 김용철 변호사가 '불법 비자금 폭로' 기자회견을 연 것이다. 김용철 변호사는 "삼성그룹이 임직원의 차명계좌를 이용해 불법 비자금을 조성해 왔다"고 수차례 폭로했다.
이 폭로는 결국 '삼성 특검' 수사로 이어졌다. 2008년 1월 출범한 조준웅 특검팀이다. 특검팀은 이학수 전략기획실장 등 핵심 경영진에 이어 이 회장까지 소환했다. 그리고 2008년 4월, 특검은 이 회장을 배임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특검은 그룹 회장의 승인과 그룹 비서실 재무팀의 조직적 개입 없이는 이같은 일이 발생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다만 당시 홍석현 중앙일보 대표이사, 홍라희 삼성문화재단 이사장 등 에버랜드 법인 주주의 대표이사들에 대해서는 이들이 전환사채 발행경위, 발행가 적정 여부 등을 몰랐다며 불기소 처분했다.
하지만 이 회장은 2009년 대법원에서 '에버랜드 사건'에 대해 최종 무죄 선고를 받았다. 대법원은 "이재용 부회장이 받게 된 전환사채는 기존 주주들이 인수청약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받을 수 있었고, 이는 죄가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 부회장은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검찰은 이재용 부회장을 직접 타깃으로 칼을 겨눴다. 검찰은 지난 2015년 7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계기로 '삼성 경영권 승계'를 다시 살펴보기 시작됐다.
단초는 '국정농단' 뇌물 수사에서 비롯됐다. 이 부회장이 승계 작업에 대한 지원 대가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 씨에게 뇌물을 줬다는 내용이었다. 2016년 12월 박영수 특검이 출범한 배경이다. 이어 2017년 1월, 이 부회장에게 청구됐던 구속영장이 기각됐다. 하지만 그해 2월 다시 청구된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이재용 부회장은 구치소에 입감됐고, 재판에 넘겨졌다.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재판은 현재 서울고법에서 파기환송심이 진행 중이다. 하지만 특검이 재판부 기피신청을 하면서 최종 판결이 늦어지고 있다. 만약 이 부회장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을 지원해달라는 목적으로 뇌물을 준 것이라면 유죄가 될 수 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인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국내 최고 기업집단인 삼성 경영진을 겁박하고 피고인들은 최서원 씨의 딸 정유라씨에 대한 승마지원이 뇌물에 해당한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이들의 요청을 거절 못한 채 수동적 뇌물 공여로 나아간 사안"이라고 판단했다.
이 부회장에 대한 검찰의 칼끝은 '삼성바이오로직스 사건'에도 향했다. 삼성바이로직스 수사는 '분식회계' 수사에서 출발했다. 2018년 11월 금융위원회 산하 증권선물위원회가 삼성바이오로직스의 회계처리가 '분식회계'에 해당한다고 판단해 고발한 것. 그런데 검찰은 '삼성 승계'로 수사를 키웠다.
검찰은 "회계부정의 배경에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있었고, 그 합병의 목적이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연결돼 있다"는 의혹을 주장했다. 제일모직의 자회사인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장부상 가치를 끌어올리면 제일모직의 가치도 커지게 된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흡수합병하면, 제일모직의 대주주인 이재용 부회장이 삼성그룹의 경영권을 승계하게 되는 구조라는 것.
최고 경영자가 법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피로도가 극에 도달하는 동안 삼성전자는 회사를 둘러싼 여러 사회 문제를 선결하기 위해 속도를 냈다. 지난 2018년 11월 반도체 백혈병 보상 합의를 시작으로 노사 관련 문제 해결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당시 삼성전자는 ‘삼성전자·반올림 중재 판정 이행합의 협약식’을 열고 11년간 이어졌던 ‘반도체 백혈병 이슈’를 해결했다. 또한 삼성전자서비스 불법파견 논란이 있었던 협력사 임직원 8000여명을 정규직으로 직접 고용했다. 지난해 12월에는 노조 와해 의혹 사건에 대한 사과도 발표했다.
◆ 그리고, 앞으로
삼성, '25년 전쟁' 배수의 진...이재용 "자녀에 경영권 승계 않겠다"
검찰은 지난 9월 1일,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사건'과 관련 이재용 부회장을 기소했다. 자본시장법·외부감사법 위반, 그리고 업무상 배임 혐의가 적용됐다.
검찰은 이 부회장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이사회 단계 ▲주주총회 단계 ▲주주총회 이후 단계에서 각각 위법행위가 수차례 있다고 판단했다. 이 위법행위의 배경에는 '삼성 승계'가 있다는 게 검찰의 결론이다.
이 부회장의 변호인단은 “국민들의 뜻에 어긋나고, 사법부의 합리적 판단마저 무시한 기소는 법적 형평에 반할 뿐만 아니라, 검찰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스스로 훼손하는 것”이라며 “검찰의 공정한 의사결정 절차를 믿고 그 과정에서 권리를 지키려 했던 피고인들로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고 승복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삼성물산 합병은 경영상 필요에 의해 이뤄진 합법적인 경영 활동이다. 합병 과정에서의 모든 절차는 적법하게 이뤄졌다고 (구속 전 피의자 심문 등에서) 확인됐다”며 “재판에 성실히 임할 것이며, 검찰의 이번 기소가 왜 부당한 것인지 법정에서 하나하나 밝혀 나가겠다”고 덧붙였다.
검찰의 기소로 이 부회장은 지난 2017년 2월부터 4년 째 재판을 받고 있는 국정농단 사건과 이 사건을 동시에 법정에서 다투게 됐다.
앞서 이재용 부회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 씨에게 삼성 경영권 승계 및 지배구조 개편 등을 도와달라는 청탁을 하고 그 대가로 총 298억2535만원의 뇌물을 제공한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1심은 이재용 부회장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지만, 2심은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지난 2017년 2월 구속된 이재용 부회장은 2심 판결을 받은 2018년 2월이 돼서야 풀려날 수 있다. 구속 353일만이었다.
이후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해 8월 이 부회장 등에 대한 상고심에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한 동안 중단됐던 파기환송심은 재개됐다.
‘경영권 불법 승계 의혹’ 관련 이 부회장의 첫 재판이 이달 22일 열렸다. 이와 별개로 ‘국정농단 사건’ 파기환송심도 26일 재판을 재개했다. 이 부회장은 10월에만 두 개의 재판을 받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
이뿐아니라, 이 부회장의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부정 의혹’과 관련된 다른 재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될 전망이다. 서울행정법원에서는 분식회계 의혹 관련 금융당국 제재의 정당성을 따지는 재판도 진행 중이다. 이러한 재판 결과는 이 부회장의 공소사실과도 연관돼 있어 추후 재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지난 1996년 ‘에버랜드 전환사채 사건’ 이후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관련해 이어져온 검찰과 삼성의 '25년 전쟁'은 이제 최종 결론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당도했다.
이 부회장은 지난 5월,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열린 '대국민 사과' 회견에서 “삼성이 글로벌 일류 기업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며 “실망을 안겨드리고 심려를 끼쳐드린 것은 저의 부족함과 잘못 때문”이라고 고개 숙여 사과했다. 이어 그는 “최근 삼성을 둘러싸고 제기된 많은 논란은 근본적으로 경영권 승계 때문”이라며 “이제는 더 이상 논란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 제 아이들에게 회사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을 생각”이라고 강조했다.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과 2대 이건희 회장, 그리고 이재용 부회장으로 이어졌던 삼성 오너 가문의 경영권 승계가 끝난다는 얘기다.
결국 삼성으로서는 경영권 승계 관련 검찰과의 전쟁은 이 부회장이 마지막이 되는 셈이다. 이 부회장에 재판은 앞으로 또 몇 년이 걸릴 수 있다. 하지만 이 부회장 이후 경영권 승계 관련 검찰과의 전쟁은 더 이상 이어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지난 25일 이건희 회장의 별세는 변수로 작용해 재판에서 이 부회장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삼성에 대한 국민적 정서, 이 회장 별세로 과거 문제점 해소 등을 감안하면 이 부회장에 유리한 국면으로 전환될 수 있기 때문.
글로벌 기업 삼성전자를 진뒤지휘할 경영자가 지리한 법적 공방 속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된 것에 대해 재개의 우려는 작지 않다. 혹자는 일련의 사태로 인해 삼성이 '잃어버린 10년'이 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지휘자의 부재는 글로벌 불확실성이 날로 커지는 상황 속에서 그 자체로 '삼성의 최대 위기'이기 때문.
조문현 법무법인 두우 대표변호사는 “권위주의 시대에 재벌 폐해의 문제점이 있었다”며 “이 부회장 기소에서 보듯이 이제 과거 풍토와는 달라진 점이 있다. 법조계도 의식구조를 바꾸고 법적 규정 등도 현실에 맞게 고쳐야 한다”고 평가했다.
검찰과 벌여온 악연의 결말이 이 부회장은 물론 경제계 전반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국민적 관심사로 대두되고 있다.
박근우 기자 lycaon@greened.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