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넥슨 김정주, 네이버 이해진 등 IT 업계에선 이미 경영권 승계 포기 잇달아
- 구광모 LG 대표, 박정원 두산 회장 등 4세 경영 돌입한 그룹도 상당수
- 재계, 작년 연말 임원승진 인사에서 3~4세 후계자 전진 배치 '세대교체'
- 일각에선 삼성은 강력한 오너 리더십으로 위기 돌파...경영권 포기 우려 시각
- 재계 1위 삼성의 경영권 승계 포기 선언으로 다른 그룹으로 확산 커질 듯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4세 경영을 포기하면서 재계에 파장이 예상된다.
국내 재계 1위 삼성그룹이 사실상 '오너 세습경영'에서 벗어나 소유와 경영을 분리한 전문 경영인 체제로 전환했다는 것은 재벌 총수 체제의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전망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6일 대국민 사과문을 통해 "아이들에게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전격 선언했다. 이어 "이제 더 이상 삼성에서는 무노조 경영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겠다"며 '무노조 경영' 폐기도 밝혔다.
총수 일가 중심의 세습 경영이 상속·증여 과정에서의 편법 난무 등으로 여론의 지탄을 받는 일이 반복되면서 '뉴(NEW) 삼성'의 일환으로 풀이된다.
따라서 삼성그룹을 시작으로 재계에 전문경영인 체제가 확산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삼성은 그간 이병철 창업자에서 이건희 회장, 3세인 이재용 부회장에게 이르는 경영권 승계가 이루어져 왔다.
이제 삼성은 4세 경영이 아닌 전문 경영인에게 그룹 전반을 맡겨 책임 경영을 강화해 대기업집단을 이끌어가는 새 시대로 전환한 셈이다.
제조업 중심 대기업 가운데 자녀에게 경영권 승계를 하지 않겠다고 대외적으로 공식 발표한 그룹은 삼성이 처음이다.
이재용 부회장은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다. 이 부회장은 오래전부터 자녀들에게 회사를 물려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주변 지인들에게 자주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부회장은 이 같은 발표 내용에 대한 주변의 만류에 "오래전부터 생각해왔고, 제 의지는 확고하다"며 뜻을 굽히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지난 2016년 12월 국회 청문회에서 이 부회장은 “저보다 훌륭한 사람이 있으면 언제든 경영권을 넘길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삼성이 그간 경영권 승계 문제로 시민단체 등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왔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 대한 수사 등 일련의 '사법 리스크'도 이 부회장에 대한 경영권 승계에 초점에 맞춰져 왔다.
그런데 이 부회장의 4세 경영 포기는 삼성에 대한 외부의 공격을 한 방에 해결한 '카운터 펀치'라는 비유가 나온다.
그간 IT 대기업 중에는 경영권 승계를 포기한 사례가 있었다.
게임업체 넥슨의 창업자 김정주 NXC 대표는 지난 2018년 ‘넥슨 공짜 주식’ 관련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뒤 "경영권을 자녀에게 승계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해진 네이버 글로벌투자책임자(GIO)도 자녀에게 경영권을 승계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해진 GIO는 네이버가 2017년 준(準) 대기업집단에 포함되면서 총수로 지정된 이후 "순환출자 및 친족의 지분 참여가 없는 투명한 지배구조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구글, 페이스북, 마이크로소프트(MS) 등 글로벌 IT 기업들도 자녀 승계가 아닌 전문 경영인 체제로 운영하고 있다.
IT업계는 기술 변화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생존을 위해 경영의 전문성이 필수적이다. 삼성 현대자동차 SK LG 등 주요 그룹도 제조업에서 탈피해 IT화가 급격히 진행 중인 상황이라는 점에서 재계의 전문 경영인 체제는 확산될 수 밖에 없다는 분석이 나오는 지점이다.
국내 대기업들은 기업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과정에서 탈세나 편법을 저질렀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증여세가 50%를 넘기 때문에 자녀 명의 회사 설립을 통한 일감 몰아주기나 순환출자방식을 주로 사용해왔다.
하지만 공정거래위원회를 비롯 시민단체 등의 재벌 감시가 강화되면서 편법 탈법 경영권 승계는 더 이상 용납이 어려워진 사회적 환경도 한 몫 했다. 전문가들은 재벌 총수들 대부분은 개인 지배력이 10~20%에 불과해 더는 증여를 할 수 없다고 전망한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글로벌 환경의 불확실성이 5G(5세대 이동통신), AI(인공지능) 등 4차산업혁명을 가속화하고 있다. 이는 대기업이 생존을 위해 빠른 IT 변화에 맞서 경영의 전문성이 확보돼야 한다는 의미다.
이재용 부회장은 "삼성전자는 기업의 규모로 보나 IT 업종의 특성으로 보나 전문성과 통찰력을 갖춘 최고 수준의 경영만이 생존을 담보할 수 있다"며 "삼성은 앞으로도 성별과 학벌, 국적을 불문하고 훌륭한 인재를 모셔와야 하고 그 인재들이 주인의식과 사명감을 가지고 치열하게 일하면서 사업을 이끌어가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저에게 부여된 책임이자 사명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삼성그룹을 시작으로 전문경영인 중심의 체제가 재계에 자리잡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주요 계열사 경영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총수는 이사회 체제를 구축한 뒤 우수 인재 영입, 투자 등에 집중하는 방식이다.
미국, 유럽 등 선진국에서는 소유와 경영을 분리한 경영체제를 구축한 기업이 다다수다.
재계에서는 이 부회장이 스웨덴의 발렌베리그룹을 벤치마킹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삼성의 롤모델로 알려진 스웨덴의 발렌베리그룹은 160여년간 5대째 가족 경영을 이어오고 있다. 발렌베리그룹은 에릭슨, 일렉트로룩스, ABB 등 세계적 대기업을 보유하고 있다.
발렌베리그룹은 전문경영인들에게 자회사의 경영을 맡기고 지주회사 인베스터를 통해 자회사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후계자도 경쟁을 통해 능력 순으로 선정한다.
국내 대기업은 대다수가 3세 경영체제에 돌입한 상태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비롯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수석부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등이 3세 경영이다.
이미 4세 경영에 들어간 그룹도 상당수다. 구광모 LG 대표,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 등이 4세 경영자다.
재계는 3~4세 경영 후계 구도 변화가 관전 포인트가 될 정도다. 작년 연말 임원 승진 인사에서 본격화했다.
허창수 전 GS그룹 회장의 외아들인 허윤홍 GS건설 부사장은 사장으로 승진하며 '4세 경영'이 본격화했다. GS칼텍스 허동수 회장의 장남인 허세홍 대표는지난 2018년 말에 사장으로 승진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장남인 김동관 한화큐셀앤드첨단소재 전무가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3세 경영체제에 들어선 것.
LS그룹에서는 고(故) 구자명 LS니꼬동제련 회장의 장남인 구본혁 LS니꼬동제련 부사장이 3세들 중 처음으로 계열사 최고경영자(CEO)에 올랐다. 구 부사장은 최근 인사에서 예스코홀딩스 대표이사로 선임됐다.
또한 LS그룹 3세들이 모두 승진했다. 구자엽 LS전선 회장의 장남 구본규 LS엠트론 전무가 부사장으로, 구자열 LS그룹 회장의 장남 구동휘 ㈜LS밸류매니지먼트부문장(상무)는 전무로, 구자철 예스코 회장의 장남 구본권 LS니꼬동제련 이사는 상무로 승진했다.
한진그룹 3세대인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은 선친 고 조양호 전 회장 별세 후 곧바로 경영권을 이어받아 작년 4월 회장에 취임했다.
구광모 LG 대표는 지난 2018년 5월 구본무 회장이 별세함에 따라 갑작스럽게 세대교체가 이뤄져 '뉴LG'로의 전환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앞서 이재용 부회장은 이건희 회장 투병 이후인 지난 2018년 5월 이 회장을 대신해 그룹 총수로 지정됐다.
정의선 수석부회장은 공정위가 지정한 공식적인 총수는 아니지만, 사실상 총수 역할을 하며 경영을 이끌고 있다.
코오롱그룹은 지난 2018년 연말 인사에서 이웅열 회장이 회사를 떠나겠다고 선언하면서 '4세 경영'에 나섰다. 이 회장의 장남 이규호 ㈜코오롱 전략기획담당 상무가 전무로 승진했다. 또 코오롱 인더스트리 FnC부문 최고운영책임자(COO)도 맡고 있다.
급변하는 디지털 전환 경영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세대교체가 재계에 화두가 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재용 부회장이 4세 경영 포기 선언을 하면서 재계는 세습 경영에 부담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바뀌게 됐다.
일각에서는 이 부회장의 '4세 승계 포기 선언'이 한국 재계에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한 매체에 "삼성은 위기마다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오너 경영의 장점을 통해 성공했는데, 국내 최대 기업이 승계 포기를 선언한 것이 우리 기업 문화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밝혔다.
재계는 이제 3~4세 경영권 승계에 대한 부담을 갖게 되면서 전문 경영인 체제로의 전환을 서두르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에 이어 재계에 경영권 포기 선언이 이어질 수도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박근우 기자 lycaon@greened.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