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기술·마케팅·인재·투자·M&A 등에 못지않게 협상과 계약 경쟁력 높여야
기자는 1세대 아이폰 사용자다. 스티브 잡스가 창조해낸 새로운 세계가 궁금해 한국에서는 비교적 일찍 아이폰을 사용한 편이다. 처음 2개월가량은 아이폰이 주는 신기함에서 헤어나지를 못했다.
삼성전자가 안드로이드를 기반으로 하는 갤럭시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기자가 아이폰을 사용한 지 얼마 지나서다.
기자는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청맹과니이지만 아이폰을 사용하면서도 애플의 폐쇄적인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폐쇄성으로 인해 개방적인 안드로이드 OS를 탑재한 갤럭시 등 다른 휴대전화에 패할 것으로 예상했다.
노마드시대를 지배할 미래의 기술은 개방적이어야 하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민주적 캐릭터를 갖춰야 한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예상은 빗나갔다. 현재로는 애플의 승리로 보인다. 아이폰 사용을 그만둔 지 10년이 가까운 지금 애플의 폐쇄성은 프라이드를 넘어 어느샌가 전세계에 ‘애플문화’를 확산시켜 ‘애플빠’라 불릴 정도의 높은 충성심을 수억명의 고객을 확보하는 원동력이 됐다.
애플의 폐쇄성이 기자에게는 “나한테 충성을 바쳐. 그렇지 않으면 나와의 관계는 없어”라며 강요를 하는 듯하다. 민주적이거나, 수평적인 관계가 아닌 듯 싶다.
애플의 신비주의는 어떠한가. 애플의 신비주의 또는 비밀주의는 애플, 정확히 말하면 고(故) 스티브 잡스 창업자의 마케팅 전략에서 시작된 것일 뿐이다.
베일에 가려진 채 소문과 관심을 증폭시켜 소비자에게 뛰어난 제품이라는 신념과 열성적 지지, 높은 관심을 갖도록 유도한 것이 애플의 기업문화로 정착됐다. 잡스는 갔지만, 그가 남긴 폐쇄주의와 신비주의는 지금도 애플의 DNA를 이루는 근간이다.
‘충성을 다해. 아니면 국물도 없다’는 식의 애플 기업문화가 진정 스티브 잡스가 원하는 기업문화였을까?
최근 현대차그룹이 애플과의 인연으로 치도곤을 치렀다.
애플과 자율주행차량 개발을 위한 모종의 협약이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에 현대차그룹 관련 종목 주가가 들썩였다. 국내외 언론을 통해 애플이 현대차그룹 전기차 플랫폼(E-GMP)을 탑재한 자율주행차를 기아차 미국 공장에서 생산할 것이라는 등의 보도에 따른 것이었다.
상황이 뒤바뀐 것은 블룸버그통신이 지난 5일 애플이 현대차 측의 협의 사실 공개에 불쾌감을 드러내며 논의를 잠정 중단했다고 보도하면서다.
현대차그룹과 애플이 차세대 자율주행차량 개발을 위해 기아차에 4조원 규모의 선급금을 지급할 계획이라더니 애플이 비밀유지협약(NDA/Non Disclosure Agreement) 파기를 이유로 협상을 중단했다는 것이다.
현대차그룹은 이에 지난 8일 "애플과 자율주행차량 개발에 대한 협의를 진행하고 있지 않다"고 공시했다. 이어 "다수의 기업으로부터 자율주행 전기차 관련 공동개발 협력 요청을 받고 있으나 초기단계로 결정된 바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해당 공시가 나오면서 현대차그룹 주가는 일제히 하락세로 반전했고, 많은 매체들이 현대차그룹의 어설픈 대응으로 애꿎은 개미투자자들이 피해를 보았다고 현대차를 질타했다.
현대차가 공시를 내놓자 “글로벌 전략적 제휴에 기본도 모르고 했다", “애플과 협의 운운하는 것 자체가 신뢰를 깨뜨린 것”, “애플이 엄청 열 받았을 것”, “홍보 효과만 본 섣부른 판단 때문에 역효과가 났다” 따위의 비판이 일었다.
심지어는 “주가 띄우기에 이용되며 우스운 사례가 됐고 결과적으로 개미들만 손해를 봤다”거나 “현대차가 글로벌 스탠다드의 기본마저 모르고 있다”는 얘기까지 나오기도 했다.
과연 그럴까? 애플은 갑질의 대명사다. ‘충성을 다해. 아니면 국물도 없다’는 식의 갑질대마왕이다. 도가 넘는 갑질로 각 국 경쟁당국의 철퇴를 맞은 기업이 바로 애플이다. 애플의 NDA는 자사 직원들은 물론 협력사에도 예외가 없을 정도로 악명 높다.
멀리 갈 것도 없다. 한국에서도 SK텔레콤. KT, LG유플러스 등 국내 통신사들 대상으로 아이폰 광고비를 떠넘기는 등 '부당한 거래조건'을 강요한 게 대표적인 사례다. 애플은 2019년부터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를 받고 최근 '상생기금 1000억원 조성','유상 수리비 10% 할인' 등의 대책을 내놓기도 했다.
각종 부품 등의 연간 구매규모가 1000억 달러를 훌쩍 뛰어넘은 ‘슈퍼갑’ 애플과 납품 협상은 일방적으로 흘러간다. 애플이 넣는 대표적인 독소조항이 ‘재고를 다른 데 팔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협력사에게는 이익 여부를 떠나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될 수도 있다.
디스플레이를 예로 들면, 애플은 독창성과 혁신성을 강조하기 위해 독특한 패널 크기를 유지하고 있다. 대부분 태블릿이 10.1인치지만 아이패드는 9.7인치이며, 아이폰과 아이팟도 범용의 크기와 다르다.
문제는 이 제품의 재고가 남으면 크기가 달라 애플 외에 팔 수가 없어 협력사가 고스란히 책임져야 하는 구조이다. 물론 계약서에도 다른 곳에 파는 걸 금지한다.
협력업체가 개발한 신기술도 옭아매는 애플이다. 신기술로 만든 부품은 1년간 다른 업체에 팔아선 안 된다는 조항을 반드시 계약에 삽입하기 때문이다.
글로벌 협력업체들은 애플을 한국의 공정거래위원와 같은 관계 당국에 애플의 ‘갑질’을 고발하려 해도 할 수가 없다. ‘공급 여부와 공급가, 수량 등을 비밀로 해야 한다’란 NDA 조항 때문이다.
애플의 폐쇄주의와 비밀주의에 따른 폐해는 결코 적지 않다. 일례로 지난 2011년 대만의 협력업체 폭스콘이 미성년자 노동으로 적발되면서 인권단체들이 강하게 압박하고 나서야 애플은 버티고 버티다 156개 협력사 명단을 밝혔다.
애플이 일찌기 10여년 전에 이미 NDA 조항을 폐지하겠다고 선언했었다. 아이폰을 출시한 지 1년 뒤인 2008년 NDA 폐지를 약속한 것이다. 스티브 잡스가 건재했을 때다.
당시 아이폰 앱(app) 개발자들 사이에서 NDA의 부당성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자 잡스가 이를 없앤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안드로이드'를 앞세워 휴대폰 시장에 뛰어든 구글을 의식한 제스처에 불과했고, 애플은 달라지지 않았다.
4차산업혁명으로 인한 글로벌기업 간 합종연횡이나 신기술의 이합집산이 유례없이 늘어날 것이고, 이럴 때마다 기업 간 협의와 계약이 무수히 이뤄질 것이다.
세계를 무대로 영업활동을 펼치며 한국을 대표하는 글로벌기업들은 신기술개발과 마케팅, 인재발굴, 투자, M&A 등에 못지않게 협상과 협의, 계약의 테크닉을 높여서 잘못된 계약으로 인한 피해를 보는 일이 없도록 해야할 것이다.
방형국 기자 real@greened.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