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TC, LG엔솔에 승기 들어줘…그러나 합의금 및 영업비밀 침해 인정 여부에서 SK이노 모두 거부
- 국내 배터리 업체들 분쟁 벌이는 사이 中 경쟁 업체들 성장세…고객사에게 불똥 튀는 사건도
세계 시장을 호령하던 배터리산업이 전례없는 위기다. 중국 경쟁사들은 무서운 속도로 쫓아오고 있다. 이젠 LG엔솔, 삼성SDI, SK이노베이션 등 이른바 배터리 3사 스스로 가격, 품질 모두 중국産의 우수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대형 고객인 자동차업체들은 배터리 내재화를 경쟁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배터리업체로서는 수십년을 투자해 이제 좀 먹고살만하니 고객이 뒷통수를 치고 갑자기 경쟁사로 변한 셈이다. LG-SK갈등은 해결 가능성보다는 시간이 갈 수록 골만 깊어지고 있다. 총리실 등 정부의 중재도 소용없다. 사생결단의 분위기다.
차세대 배터리라는 전고체배터리는 일본, 미국에 비하면 걸음마 단계다. 아직도 국내 배터리3사는 20년이상 가져온 근거없는 자신감에 취해있어 상황파악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다. 위기의 배터리산업. 5회에 걸쳐 짚어본다.[편집자주]
국내 배터리업계의 핵심 축을 맡고 있는 LG에너지솔루션(이하 LG엔솔)과 SK이노베이션(SK이노) 간의 배터리 영업비밀 침해 소송이 고착화 상태에 빠졌들었다.
LG엔솔은 ITC의 판결을 근거로 SK이노가 자신들의 합의 조건을 따를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으며, SK이노는 LG엔솔의 조건이 너무 과도하며 이를 수용할 바에는 미국 사업을 철수하는 것이 더 낫다는 입장이다.
현재 CATL, BYD 등 중국의 전기차 배터리 업체들은 기술 발전 속도나 시장 점유율 면에서 모두 맹위를 떨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사업 본연에 집중하기는 커녕 지지부진한 싸움을 이어가는 국내 배터리 업체를 향해 업계는 거듭 우려의 시선을 나타내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관련 소송에 투입되는 비용이 적지 않고 이를 둘러싼 우려가 적지 않은 만큼 협상에 최선을 다해 임하고 있다"면서도 "업체 간의 의견이 극명하게 갈려 합의점을 찾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다"고 전했다.
LG엔솔-SK이노, 3년간 지속된 배터리 분쟁의 역사
LG엔솔(당시 LG화학)과 SK이노간의 해당 분쟁은 지난 2019년 4월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당시 LG엔솔은 SK이노를 상대로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와 델라웨어주 연방지방법원에 영업비밀 침해 소송을 제기했다.
LG엔솔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지난 2017년을 기점으로 LG엔솔의 연구 및 생산 부문 핵심 인력이 잇따라 SK이노로 이직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대해 LG엔솔은 SK이노가 "인력을 빼간 것"이라며 내부 조사를 통해 이직한 사원이 전산시스템에 접속해 회사의 핵심 기술 문서를 출력한 사실을 확인했다.
SK이노는 LG엔솔의 배터리 사업 경력사원 100여명을 채용한 것은 인정하면서도 "이직은 SK의 기업 문하와 임금 차이 등에서 발생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받아쳤다. LG엔솔이 기술 유출 증거로 제시한 자료에 대해서도 "이직자들이 자신의 성과를 입증하기 위해 정리한 자료로 모두 파기했다"고 밝혔다.
이후 양사의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LG엔솔이 2019년 5월 서울지방경찰청에 SK이노를 추가로 고소하자, SK이노는 바로 다음달 LG엔솔을 명예훼손에 따른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9월에는 ITC와 연방지방법원에 LG엔솔과 LG전자를 배터리 특허 침해 혐의로 제소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양사가 1년 반동안 국내외에서 진행한 소송은 10건에 달한다.
이 중 핵심이 되는 배터리 영업비밀 침해 관련 ITC 소송은 치열찬 양상 속에서 전개됐다. ITC는 지난해 2월 진행한 예비 판결에서 SK이노의 조기 패소 승인 예비를 결정했으나, SK이노가 제기한 이의가 받아들여져 소송은 전면 재검토 상태로 돌아갔다.
이후 코로나 등을 이유로 두 차례나 연기된 ITC의 최종 판결 시기는 올해 2월 10일로 확정됐다. 최종 판결을 앞두고도 날 선 공방전을 멈추지 않는 양사를 향해 정세균 국무총리는 “소송비용만 수천억원에 달한다고 하는데 경제적인 것뿐 아니라 양사가 싸우면 남 좋은 일만 시킨다"며 "양사 최고책임자와 만나 낯 부끄럽지 않느냐고 이야기를 했는데도 아직도 해결이 안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정 총리의 쓴소리에도 합의에 이르지 못한 양사 앞으로 마침내 ITC의 최종 판결이 다가왔다. 지난 2월 11일 ITC는 LG엔솔의 손을 들어주고 SK이노에 '10년간 미국 내 관련 제품 수입 금지'라는 판정을 내렸다.
합의금 규모·영업비밀 침해 인정 여부에서 첨예한 갈등…합의 가능성 안 보여
ITC는 의견서를 통해 “SK는 LG의 영업비밀이 없었다면 10년 이내에 해당 기술들을 개발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증거 인멸 역시 심각한 수준"이라고 명시했다. 다만 업계의 타격을 고려해 폭스바겐과 포드에 각각 2년, 4년이라는 유예기간을 뒀다.
LG엔솔은 즉각 ITC의 판결을 바탕으로 SK이노가 협상에 진정성 있게 임할 것을 권고했다. 합의금은 영업비밀 침해에 따른 피해와 SK이노베이션의 부당 편취 이득, 소송 비용 등을 산정해 2~3조원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SK이노는 영업비밀 침해 사실 인정 여부에도, LG엔솔이 제시한 합의금 규모에도 모두 고개를 내저었다. SK이노는 ITC의 의견서에 유감을 표하며 “ITC는 영업비밀 침해라고 결정하면서도 침해됐다는 영업비밀이 무엇인지와 어떻게 침해됐다는 것인지에 대해 판단하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LG엔솔이 제시한 합의금 규모에 대해서는 "LG엔솔의 요구 조건이 사실상 자사가 미국에서 배터리 사업을 지속할 의미가 없거나 사업 경쟁력을 현격히 낮추는 수준이라면 수용이 불가능하다"고 못박았다. 현재 SK이노는 미국 조지아주 잭슨카운티에 배터리 공장을 건설하기 위해 총 26억달러(한화 약 3조원)를 투자하고 있는데, 최악의 경우 사업을 포기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초강수'를 둔 셈이다. LG엔솔은 이에 지지 않고 조지아주에 SK이노의 공장을 대신 인수할 수도 있다는 뜻을 담은 서한을 보낸 것으로 전해졌다.
이외에도 양사는 ITC의 최종 판결을 뒤집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인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거부권을 두고도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일례로 LG엔솔은 최근 미국에 5조원 규모의 추가 투자를 단행한다고 밝혔는데, 이를 두고 업계에서는 미국을 회유하고 바이든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저지하기 위한 전략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한편 김종훈 SK이노 의장은 최근 미국 조지아주를 직접 방문해 정치권 관계자들에게 바이든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필요함을 호소했다.
바이든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기한은 오는 4월 11일까지다. 이 시기까지도 양사가 원만한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 양사는 거듭된 출혈을 마다하지 않고 미국의 선심을 얻기 위한 소모적인 경쟁을 지속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한 재계 관계자는 "LG엔솔과 SK이노는 정 총리의 중재 시도에도 분쟁을 이어갈 만큼 첨예한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며 "양 사간의 입장이 너무나 달라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경쟁사에겐 기회, 고객사에겐 민폐인 LG엔솔-SK이노 배터리 분쟁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1월 기준 중국의 배터리 업체 CATL은 전 세계 배터리 시장에서 전년 동기(22.8%) 대비 8.4%p 상승한 31.2%의 점유율로 1위를 차지했다. BY 또한 8.9%의 점유율로 전년 동기(3.6%) 대비 5%p가 넘는 성장세를 거뒀다.
반면 국내 배터리3사의 점유율은 일제히 하락했다. LG엔솔이 지난해 1월 23.9%의 점유율에소 올해 1월 18.5%로 큰 하락폭을 보였다. 같은 기간 삼성SDI는 7.8%에서 4.8%로, SK이노는 4.5%에서 3.9%로 점유율이 떨어졌다.
그간 독보적인 기술력을 바탕으로 수많은 완성차 업체들과 공급망을 공고히하던 K-배터리의 위상이 연초부터 삐걱대는 모양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근 폭스바겐그룹은 LG엔솔과 SK이노로부터 공급받던 파우치형 배터리를 각형으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폭스바겐그룹은 오는 2030년까지 각형 배터리를 탑재한 전기차의 비중을 80%로 늘릴 전망이다. 이는 각형 배터리를 주로 생산하는 CATL에게는 호재로, 나아가 CATL은 올해만 해도 배터리 생산 시설 증대에 12조원을 쏟아부을 예정이라 국내 배터리 업계를 더욱더 긴장하게 만들고 있다.
LG엔솔과 SK이노에게서 전기차 배터리를 공급받던 고객사들은 양사간의 끝없는 분쟁이 불안하기만 하다. 실제로 짐 팔리 포드 CEO는 지난달 SNS를 통해 "LG엔솔과 SK이노의 합의는 궁극적으로 미국 전기차 제조사와 근로자들에게 최선의 이익"이라며 양사의 합의를 촉구한 바 있다.
또한 포드는 양사의 분쟁으로 인해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기도 했다. ITC가 LG엔솔과 SK이노의 배터리 분쟁에 대한 최종 의견서에 "포드도 SK이노의 위법 행위를 알고서도 사업 관계를 계속하기로 한 것은 포드의 잘못"이라고 지적한 것. 이에 포드는 "SK이노의 부당 경영이 드러나기 전부터 배터리 사업을 진행해왔으며 SK의 위법 행위를 용납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미국 조지아주는 공장 가동 자체가 불투명해진 상황에 양사간의 합의를 거듭 호소하고 나섰다. 현지 매체인 뉴넌타임즈-헤럴드에 따르면 버치 밀러 조지아주 상원의원(공화당)은 "SK이노베이션 공장 철수는 조지아주의 민관에 수십억 달러의 투자 비용을 들게 하고 수백명의 사람을 실직시킬 것"이라고 강조했다.
젠 조던 상원의원(민주당) 역시 "양사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을 때 합의안에 도달해야 한다"며 "합이를 통해 현지 주민들의 일자리가 보존되기를 바란다"고 거들었다.
장경윤 기자 lycaon@greened.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