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정원 늘리는 것?… “이공계 억압하는 꼴”
[녹색경제신문 = 이선행 기자] 우리나라 반도체학과가 정부의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반도체를 국가 안보로 여겨 세계 여러 나라가 우수 인재 양성 등 경쟁력 확보에 힘쓰고 있는 상황이어서 더욱 우려된다.
반도체학과 A 교수는 올해 예정됐던 R&D 예산의 80% 이상이 깎였다. 그는 “예산의 90% 이상이 깎인 동료도 있다. 실로는 간판만 있고 손발이 묶인 상태”라며 “정부에서 원래 약속했던 사업 금액을 일방적으로 줄여 버렸다. 소송 등의 절차를 밟아 불만을 제기하라고는 하지만, 국립대는 물론이고 사립대 또한 교부금을 받는 상황에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하란 것인지 모르겠다”며 헛웃음을 지었다.
A 교수는 한정된 예산에서 제한된 교육만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반도체 설계를 위한 틀을 제작해 시뮬레이션을 돌리려면 라이센스가 필요하다. 매년 계약해 갱신해야 하는 라이센스는 자그마치 수천만 원”이라며 “라이센스를 비롯한 반도체 실습용 기자재는 적게 사거나 아예 사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대학의 반도체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B 교수는 R&D 사업에 참여하는 학생 수를 줄였다. 그는 “박사후연구원(포닥) 학생들은 석·박사 과정 학생들보다 많은 임금을 줘야해 올해 계약을 연장하지 않았다. 학생연구원들을 보통 6~7명 정도 뽑는데 한두 명으로 줄여 인원을 모집했다”고 말했다.
이어 “연구 활동 또한 컴퓨터 한 대로도 가능한, 페이퍼 위주로 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돌아가는 기회와 학생들이 누릴 수 있는 경험의 폭이 눈에 띄게 줄었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신진 연구자 지원 방식 변경은 반도체 미래 인재를 육성하는 교수들의 문턱을 높였다. C교수는 “올해부터 적은 인원에게 더 많은 기초 연구 과제 비용을 지원하도록 바뀌었다. 기존에 10명에게 1억 원씩 지원했다면 5명에게 2억 원씩 지원하는 식”이라며 “신규로 임용된 교수들은 그다지 큰 비용이 필요하지 않다. 더 많은 이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방식이 바람직하다”고 꼬집었다.
우후죽순으로 신설되는 반도체 관련 학과에 대한 문제도 제기됐다. D교수는 “여러 곳으로 예산이 분배되다보니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장비 구입, 클린룸(반도체를 만드는 공간) 구축 등 시설 투자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교육의 질이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전문인력 확보 없이 학과 신설에만 목매는 것 또한 문제”라고 말했다.
E교수는 사회 전반의 인식이 바뀌고 대우 개선 또한 필요하다고 짚었다. 그는 “미국이나 중국, 대만과 같은 나라들에서는 똑똑한 사람들이 공대에 간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고 기업들의 대우 또한 좋다”며 “국가 기술 인력 확보 차원에서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말했다.
이어 최근 불거진 의대 증원 문제와 관련해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의대 선호도가 높았다. 정원까지 늘리는 것은 이공계 억압과 다름없다”고 말했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기업) 기업인 TSMC를 보유한 대만에서 인공지능(AI) 반도체 열풍으로 관련 학과들의 인기가 치솟고 있다.
최근 중국시보 등 대만 언론은 대만 대학선발입학위원회의 자료를 인용해, 2024학년도 대입 지원에서 AI와 정보통신 산업과 관련된 학과들에 높은 경쟁률을 보인 반면 인문학과 역사 분야 등 인문 계열은 위기에 처했다고 보도했다.
우리나라 이공계 우수 인력들이 의대로 쏠리는 현상이 심해지는 상황과 대조적이다.
한편 정부는 이르면 다음 주 이공계 학생 연구원을 지원하기 위한 대책을 내놓는다. 대학원생에게 매월 생활비를 제공하는 ‘연구생활장학금(한국형 스타이펜드) 제도’가 중점이 될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구체적인 지원 방법 및 규모에 관심이 쏠린다.
이선행 기자 lycaon@greened.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