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건희 '신경영 선언' 연상케하는 강도높은 주문
- 사장단 및 임원 대상 '삼성다움' 정신 재무장 나서
[녹색경제신문 = 박근우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삼성그룹 계열사 임원 20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영상 메시지에서 주요 사업부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짚어 가며 질책한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2020년 이건희 선대회장 별세 이후 6년째 삼성을 이끌어 온 이재용 회장이 그간 '부드러운 리더십' 행보에서 벗어나 이례적으로 강도 높은 메시지를 낸 것이다.
'사즉생(死則生)' 정신 아래 '독한 삼성인' 각오로 '삼성 위기론'을 정면 돌파에 나선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따라서 조직문화 혁신 및 정신 재무장에 방점이 찍힌다.
17일 삼성 임원 대상 교육 참석자들에 따르면 이재용 회장은 영상 메시지에서 "전 분야에서 기술 경쟁력이 훼손됐다"며 "과감한 혁신이나 새로운 도전은 찾아볼 수 없고, 판을 바꾸려는 노력보다는 현상 유지에 급급하다"고 질책했다.
앞서 삼성은 연초에 사장단을 대상으로도 같은 메시지를 공유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이재용 회장은 "메모리 사업부는 자만에 빠져 인공지능(AI) 시대에 대처하지 못했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부는 기술력 부족으로 가동률이 저조하다", "(TV·스마트폰·가전 등을 포괄하는) 디바이스경험(DX) 부문은 제품의 품질이 걸맞지 않다" 등 삼성전자의 각 주요 사업부의 문제점을 일일이 꼬집었다.

또한 "21세기를 주도하며 영원할 것 같았던 30개 대표 기업 중 24개가 새로운 혁신 기업에 의해 무대에서 밀려났다"며 "남의 일이 아니다”라고 위기감을 토로했다. 이어 "인류의 미래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기술 혁신이 지속되는 국가 총력전의 양상이 펼쳐지는데, 우리 경제와 산업을 선도해야 할 삼성전자는 과연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가"라는 자성도 했다.
이재용 회장은 "위기 때마다 작동하던 삼성 고유의 회복력이 보이지 않는다"며 근본적인 조직문화 혁신 필요성을 제시했다.
경영진 및 임원의 자세와 역할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주문을 내놨다.
이재용 회장은 "적어도 1년에 절반 이상 고객과 시장을 찾아가라"며 "자신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문제가 무엇인지 철저히 파헤치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답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이재용 회장은 이번 영상에서 "첫째도 기술, 둘째도 기술, 셋째도 기술"이라며 "경영진보다 더 훌륭한 특급 인재를 국적과 성별을 불문하고 양성하고 모셔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거 'S급 인재' 영입에 사활을 걸었던 이건희 회장의 '인재제일' 가치를 이어가겠다는 것.
영상은 교육 시작 서두에 3분 남짓한 길이로 상영됐다. 고(故) 이병철 창업회장과 고 이건희 선대회장 등 오너 일가의 경영 철학도 강조됐다. 이재용 회장의 해외 사업장 방문 등 '현장 경영' 장면도 스틸컷으로 등장했다.
영상 상영 이후에는 리더십 교육과 외부 강연, 세미나 등이 이어졌다. 이광형 KAIST 총장, 이정동 서울대 기술경영경제학과 교수,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 등 외부 전문가들이 바라보는 삼성의 위기에 대한 진단이 이어졌다.

교육을 마친 임원들에게는 각자의 이름과 함께 '위기에 강하고 역전에 능하며 승부에 독한 삼성인'이라고 새겨진 크리스털 패가 수여됐다. 수료패에 새겨진 '독한 삼성인' 문구는 과거부터 삼성 임직원들이 사업장이나 회식 자리 등에서 자랑스럽게 나누던 정신이라고 한다. '삼성다움'이란 가치로 정신 재무장할 것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재계에서는 이재용 회장의 메시지에 대해 이건희 선대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연상케 한다는 반응도 나온다. 이건희 회장은 회장 취임 6년 만인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삼성 수뇌부를 소집해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신경영 선언'을 발표했다. 이재용 회장은 2020년 이건희 회장 별세 이후 삼성을 이끈 지 올해로 6년차에 이르렀다.
한편, 삼성은 사업 경쟁력이 매년 떨어지고 있다. 최근 삼성전자가 공시한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TV-스마트폰-D램-스마트폰 패널-차량용 디지털 콕핏(cockpit) 등 주요 사업 부문의 점유율은 모두 하락했다. TV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2023년 30.1%에서 지난해 28.3%로 떨어졌다. 스마트폰은 19.7%에서 18.3%로, D램은 42.2%에서 41.5%로 하락했다. 스마트폰용 디스플레이 패널은 50.1%에서 41.3%로, 디지털 콕핏은 16.5%에서12.5%로 감소했다. 특히 최근 반도체 시장 승부처가 된 고대역폭메모리(HBM)도 SK하이닉스에 뒤지고 있다.
삼성 안팎의 리스크도 문제다. 삼성 경영진은 '주 52시간제 예외' 적용을 포함한 반도체특별법 통과에 사활을 걸고 있지만, 노조는 반대하고 있다. 작년에는 삼성전자 창사 이래 첫 파업도 벌어졌다. 이재용 회장에 대한 '사법 리스크'도 오랜 기간 삼성의 발목을 잡고 있다.
박근우 기자 lycaon@greened.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