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빅데이터 시대 온다”...‘비대면 채널 강화’ 자체 플랫폼 구축 움직임 보이는 증권사들
- 금융사와 금융 플랫폼, 언제까지 어깨동무 가능할까?
빅테크(Big Tech)들의 금융 플랫폼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금융업과 IT 기반 플랫폼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빅블러(Big Blur)’ 현상이 나타나는 가운데 증권사들과 핀테크 기업 간 성장 전략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카뱅·한투 이벤트 한방에 2030세대 신규계좌 100만 가입...11월 네이버·미래에셋 도전장
국내 빅테크 금융 플랫폼은 고객 편의와 친근감을 앞세워 기존 금융권 마케팅 방식을 단번에 뛰어 넘는 파괴력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투자증권은 카카오뱅크와 단 한 번의 제휴 이벤트를 통해 지난 3월부터 약 4개월 만에 100만 개에 가까운 신규계좌 개설에 성공한 것으로 알려져 업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온라인 주식계좌 ‘뱅키스’를 운영한 13년 간 모은 계좌 수를 훌쩍 뛰어넘는 결과다. 이번 신규 유입 고객은 80% 이상이 2030세대로 향후 성장 잠재력이 큰 투자 수요층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이번 제휴 이벤트로 강력한 플랫폼 효과를 실감한 한국투자증권은 카카오뱅크의 지분 50%를 보유한 대주주다. 곧 지분정리를 통해 카카오에게 대주주 지위를 넘길 예정이지만 카카오뱅크 지분 일부를 의미 있는 수준에서 보유하며 카카오와 밀접한 협력 관계를 유지할 계획이다.
미래에셋대우도 오는 11월 1일 네이버에서 네이버페이를 분사해 설립 예정인 네이버파이낸셜에 전략적 파트너사로서 5000억 원 이상을 투자할 예정이다. 카카오에 대적하는 네이버 역시 국내 최고로 평가 받는 빅테크 기업이자 커머스 기반 금융 플랫폼 사업자로서 대규모 이용자를 확보하고 있다.
이처럼 국내 최고의 빅테크 기업과 증권사가 연합을 이뤄 ‘카카오·한국투자증권’ 진영과 ‘네이버·미래에셋’ 진영의 라이벌 구도로 맞붙는 모양새가 연출되면서 증권사 간 플랫폼 전쟁이 곧 확전 양상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이보다 한참 전인 지난 2017년 7월 신한금융투자도 현재는 유니콘 기업으로 성장한 핀테크 기업 비바리퍼블리카의 ‘토스’와 일찍부터 업무 제휴를 맺고 종합자산관리계좌(CMA) 신규계좌 유치에 나서 50만좌 이상 확보에 성공하는 등 쏠쏠한 재미를 봤다. 신한금융그룹은 올해 초 토스와 컨소시엄을 구성하고 제3 인터넷전문은행에 뛰어들기도 했다.
NHN페이코, 뱅크샐러드 등 금융 플랫폼 사업자들도 여러 금융사들과 공격적으로 제휴를 맺고 있어 향후 전선을 확대할 가능성이 높다.
NHN페이코는 지난 5월 과기정통부와 데이터산업진흥원이 선정한 ‘마이데이터 실증 서비스 지원사업’ 금융 분야 대상 기업으로 한화투자증권, 한화생명보험, 한화손해보험 등 6개 금융사와 컨소시엄을 구성해 ‘생애주기별 금융 추천 서비스’ 출시 예정이다.
뱅크샐러드는 최근 법제화에 성공한 P2P금융 업권의 최상위권 기업인 어니스트펀드와 손잡고 SCF(Supply Chain Finance) 채권에 투자하는 첫 단독 서비스를 내놓기도 했다.
금융당국도 한편에서는 기존 금융사에 대한 규제 강화로 금융 소비자 보호에 적극 나서지만, 핀테크 분야에서만큼은 금융 샌드박스 제도 등 정책적 지원을 통해 활로를 열어주면서 핀테크 산업 스케일업을 위해 금융사의 핀테크 투자 활성화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는 상황이다.
▲“AI·빅데이터 시대 온다”...‘비대면 채널 강화’ 자체 플랫폼 구축 움직임 보이는 증권사들
증권사들이 금융 플랫폼 기업들과 앞다퉈 업무 제휴를 맺고 있는 반면에 ‘AI·빅데이터 시대'를 거부할 수 없는 대세로 읽고, 과거 HTS·MTS 등 수동적인 측면의 보안 투자에서 나아가 자체 플랫폼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
특히, 은행을 비롯한 보험, 카드 등 금융사 가운데 증권사들은 HTS·MTS 등 일종의 플랫폼 역할을 하는 고객과의 접점이 별도로 있어 왔다. 키움증권의 온라인 주식거래 플랫폼 ‘영웅문’이 대표적인 사례다.
키움증권은 약 20년 전 온라인 주식 중개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개인투자자 전용 주식 거래 플랫폼으로서 순식간에 시장을 장악해버렸다. 이후 증권사 간 출혈 경쟁이 격화돼 전통적인 수익원인 브로커리지 영역이 결국 레드오션으로 변했다. 현재 증권사들은 마케팅 수단으로써 거의 ‘현금 살포’ 수준의 수수료 무료 이벤트를 펼치며 비대면 계좌 개설에 주력하고 있다.
온라인 정체성이 강한 키움증권이 내달 제3 인터넷전문은행 재인가 도전에 성공하면 주가지수와 연동성이 심한 수익구조를 다각화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플랫폼 사업자로서 성공한 경험을 바탕으로 플랫폼 사업 확장도 가능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자체 플랫폼 강화 움직임은 증권사 채용 시장에서도 읽을 수 있다.
증권사를 비롯한 금융사들은 전산 시스템 개발과 유지보수에 막대한 투자가 이뤄진다. 하지만 최근에도 증권사들의 전산 사고가 끊이지 않아 전산 관리에 대한 금융당국의 지적과 경고가 계속되는 상황이다. 따라서 증권사들은 일정 규모의 전산 인력을 반드시 유지해야만 한다.
그런데 최근 증권사별 IT 분야 채용 트렌드는 시스템 유지관리나 보안 인력이 아닌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사업 관련 개발자에 맞춰져 있다. 디지털 전환(DT, Digital Transformation)이 이 시대의 화두가 되면서 디지털 혁신 관련 부서가 새로 생겨나고 힘도 실리는 형국이다.
과거 전산실 시절에는 후방 부서로 인식돼 보안 차원에서만 중요성이 강조되는 분위기였다면 지금은 회사의 생존과 직결된 핵심부서로 ‘디지털 전사’의 역할을 맡으며 사내에서 존재감도 커지고 경력직의 경우 급여 수준이 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에 지점의 존재감이 약해지면서 영업직 채용도 크게 줄고 있다. 증권사뿐 아니라 대부분 금융사들이 고정비가 큰 지점을 금융복합점포로 통폐합하거나 축소하는 대신에 비대면 영업 채널 투자를 늘리고 있는 것이다.
과거처럼 지점을 확장하고 인력을 많이 뽑아 대면 영업에 치중하기 보다는 요즘 ‘핫’한 플랫폼 기업과 마케팅 업무 협약을 맺거나 자체 플랫폼을 강화해 비대면 채널이 확대되면 보험, 대출, 카드 등 모집인에게 지급되는 대행수수료를 크게 절감할 수 있다는 셈법이다.
▲금융사와 금융 플랫폼, 언제까지 어깨동무 가능할까?
한편, 지금처럼 소수의 대형 금융 플랫폼 회사들이 다수의 금융사들과 한꺼번에 업무 제휴를 늘려가면서 앞으로도 플랫폼 종속 현상은 더욱 심화해 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금융 플랫폼 기업들의 기업가치가 높아지고, 거액의 투자 유치도 가능해지면서 당장은 기존 금융사와 협업관계에 있지만 향후에 경쟁 관계로 바뀔 수 있다는 시각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금융 플랫폼 사업자가 마케팅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직접 금융업에 진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토스를 운영하는 비바리퍼블리카는 최근 금융당국과 소통과정에서 불협화음이 나오고는 있지만 증권사 인수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정부의 규제 완화를 요구하고 있다.
카카오페이 또한 대주주 적격성 심사가 지연되면서 난관에 부딪쳐 애를 먹고는 있으나 인내심을 가지고 바로투자증권 인수를 강력하게 추진 중인 상황이다.
채용 시장에서는 기존 금융사와 금융 플랫폼 기업 간 디지털 인력 쟁탈전이 치열하게 펼쳐지고 있다. 금융 빅데이터 산업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IT 개발자나 디지털 사업 기획자 등 인력 수요는 많은데 그만큼 공급이 따라주지 않아 고액 연봉과 높은 복지를 제시하며 ‘모셔가기’ 경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움직임을 바라보는 기존 금융권에서도 의견이 갈린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금융업의 본질은 리스크 관리인데 IT회사의 DNA와는 맞지 않는 것 같다”며 “고객 편의성만 따지면 플랫폼 회사들의 강점이 분명히 있지만, 금융 소비자 보호에 대한 측면이 더 중요해 금융업이 규제 산업에 속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특히 증권사가 하는 사업들 가운데 실제로 큰 수익이 나는 사업은 휴먼 비즈니스”라며 “기본적으로 국내 증권업 자체가 개인을 상대로 자산관리 수수료나 금융상품을 팔아서 거두는 수입보다 거액의 자산을 굴리는 기관투자자를 상대하거나 자기자본을 투자해 버는 수입이 더 큰 ‘사람장사’ 사업”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업계에서는 금융 플랫폼 기업들이 결국 금융사 영역에 눈독을 들일 수밖에 없다는 의견에 무게가 더 실리고 있다. 플랫폼에 모인 고객들의 데이터를 활용한다면 적어도 개개인의 금융상품 니즈는 플랫폼 회사가 더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향후 금융사들의 견제도 심해질 수밖에 없다. 뱅크샐러드처럼 금융사업 진출설에 선을 긋는 기업도 벌써부터 나온다.
핀테크업계 관계자는 “요즘 금융당국이 역대급 속도와 큰 방향 전환으로 아무리 규제를 풀고 있다 하더라도 IT 기반 사고에 익숙한 핀테크 기업들과 규제 중심 사고방식을 가진 금융당국이 부딪히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다”며 “사용자 편의와 소비자 보호 사이의 간극은 본질적으로 좁힐 수 없는 문제로 서로에 대한 몰이해가 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금융업계 관계자는 “금융사들이 수십 년간 쌓아온 노하우와 네트워크를 무시 못 하고, 대면 비즈니스가 필요한 영역이 아직은 많다”며 “지금 핀테크 기업들이 뛰어들고 있는 사업들은 금융사가 라이선스를 이용해 수익을 거두고 있는 수많은 사업들 가운데 몇 개에 불과하다”며 금융 플랫폼 회사의 금융업 진출에 대해 일축했다.
하지만 “금융사들도 ‘디지털 전환’이라는 대세는 어쩔 수 없이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금융사가 가진 자본과 리스크 관리 노하우와 IT 기반의 플랫폼 사업자들의 폭발적인 마케팅 힘이 어떤 방식으로 균형과 견제의 관계를 형성할지는 멀리 두고 봐야할 문제”라고 내다봤다.
이석호 기자 financial@greened.kr